박제가

박제가

[ 朴齊家 ]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750년(영조 26년) ~ 1805년(순조 5년)
본관 밀양(密陽)
이명 : 차수(次修)
: 초정(楚亭)
직업 실학자

조선 후기의 자. 자는 차수(次修), 호는 초정(楚亭), 본관은 밀양.

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과도 친교를 맺었다. 출신으로 1777년 서얼허통이 시행된 이후 79년에는 검서관이 되어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이른바 4검서로 이름을 떨쳤다. 우리나라 사회상에 대한 연구와 3차에 걸친 중국여행을 통해 얻은 자료를 토대로 국가의 경제발전을 촉진시킬 것을 주장했다. 78년(정조 2) 사신행렬의 일원으로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해 병기의 개선, 영농법의 개량, 선진기술의 도입을 주장했으며 종두법의 연구에도 관심을 쏟았다.

학문이 실제생활과 국방 등 국가경영에 도움을 주어야 하며, 이를 위해 발달한 외국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해 의 사상을 집대성한 실학자로 꼽힌다. 박제가의 사상은 정약용에게 영향을 주어 그로 하여금 실학사상을 집대성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 평가된다. 그 밖에도 칠언율시를 잘 지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