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

서학

[ 西學 ]

시대명 조선

조선 후기에 전래된 천주교와 서양의 문물을 가리키는 말.

중 일본군을 따라 포르투갈 선교사 가 조선에 들어왔으나 선교활동은 펴지 못했으며 이 지봉유설>에서 서양의 소식과 명에 와 있던 선교사 의 <천주실의>를 소개한 것이 을 받아들인 시초였다. 1603년(선조 36) 이 북경을 왕래하면서 천주교에 관심을 쏟았으며 31년(인조 9) 이 명에 다녀와서 망원경·서양식 대포·시계·세계지도·천문학과 천주교에 관한 책을 가져왔다. 후 청에 볼모로 끌려갔던 는 귀국할 때 천문·수학·천주교 책과 지구의 등을 가져왔다. 또한 풍랑에 표류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벨테브르와 일행 등에 의해서 서양의 대포 제작기술이 알려지기도 했다. 영조 말년부터 서학은 자들과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학자들 사이에서 폭넓은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한 실학자들의 태도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달랐다. 이수광이나 과 같이 단순한 호기심 또는 학문이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에서 서학을 연구한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 , 정약종(鄭若鐘) 등과 같이 천주교를 신봉한 경우도 있었으며, 반대로 신후담(愼後聃)이나 과 같이 천주교를 비판하는 입장에서 교리를 연구한 경우도 있었다.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천주교의 전파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으나 1788년(정조 12) 8월 이경명(李景溟)이 서학의 폐를 상소하고, (蔡濟恭)이 <천주실의> 등 서학에 관한 서적이 어리석은 들을 현혹시킨다고 주장하면서 마침내 사학(邪學)으로 규정되게 되었다.

특히 91년 윤지충(尹持忠)이 어머니의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사건이 발생하면서 탄압은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의 탄압은 교리의 문제나 사회적 풍속의 차이 때문에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고 시파와 벽파의 대립 등 정치적 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한편 천주교가 유포되자 을 신봉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천주교를 배척하고 고유 전통을 지킨다는 (벽위사상)이 광범하게 전개되었다. 이와는 별도로 민간에서도 서학에 반대하는 이 나타나 널리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