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당

박세당

[ 朴世堂 ]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629년(인조 7년) ~ 1703년(숙종 29년)
본관 반남(潘南)
이명 : 계긍(季肯)
: 서계(西溪)
직업 학자

조선 후기의 학자.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반남.

1660년(헌종 1) 에 급제한 이래 병조좌랑, 함경도 병마평사(兵馬評使) 등 내외관직을 역임했다. 68년 사신의 일원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후 당쟁에 회의를 느끼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후 잠시 벼슬자리에 돌아온 적도 있으나 대부분의 생활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주력했다. 그는 과 병역의 균등화, 법률의 혁신, 사대부의 횡포에 대한 고발, 중국의 세력변동에 대해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 외교 등 사회의 현실을 올바로 파악하여 나라를 유지하고 사회의 개혁을 통해 민생을 구제하는데 학문의 목적을 두었다.

특히 자유롭고 독창적으로 경서를 해석해 과 경서에 대한 주자의 해석을 반박하고 원시유학인 공맹사상(孔孟思想)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또한 중국 중심적인 학문의 태도를 비난하고 유학의 입장에서 노장사상 등을 도입해 유학의 실리적 측면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론이었던 박세당의 반성리학적 유학사상은 노론이 집권하면서 비난을 받아 사문난적으로 몰리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