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송시열

[ 宋時烈 ]

시대 조선
출생 - 사망 1607(선조 40) ~ 1689(숙종 15)
이명 : 영보(英甫)
: 우암(尤庵), 화양동주(華陽洞主)
직업 학자, 정치가

조선  중기의 학자·정치가.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1663년(인조 11) 생원시에 합격했으며, 35년 봉림대군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 때는 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는 것을 모셨으나 정부가 청의 요구에 굴복해 화의가 성립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효종 즉위 후 다시 벼슬길에 올랐으나 김자점과의 대립으로 다시 낙향했다. 효종이 북벌계획을 추진함에 따라 등용되어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효종의 죽음으로 북벌계획은 중단되었다. 효종의 장례 때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로 발생한 예송논쟁에서 기년설(1년설)을 주장해 채택됨으로써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정권을 수립했으나 74년 인선왕후의 죽음으로 발생한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에서 대공설(9개월)을 주장하다가 실각하고 유배되었다.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은 후 남인에 대한 과격한 숙청을 주장하다가 서인 중 소장파들과 대립했으며 마침 제자였던 윤증과의 감정도 악화되어 마침내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었다. 후에 정계에서 은퇴해 화양동에 은거하던 중 장희빈의 아들 균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에 유배되었으며 사약을 받았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해 4단7정(四端七情)이 모두 이(理)라고 하여 일원론적인 사상을 발전시켰으며 예론에도 밝아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