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성리학

[ 性理學 ]

시대명 조선

유학의 한 분류로서 송명시대(宋明時代)의 유학을 말한다.

성리학이란 원래 「성명의리의 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로서 성명과 의리를 캐는 학문이란 뜻이며, 정주학(程朱學)·주자학(朱子學)·(道學)·(陽明學)·심학(心學) 등으로도 불린다. 이 중 정주학·주자학·도학이 송대의 한 계통이고, 양명학·심학이 명대에 일어나 한 계통을 이루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정주학 계통만이 발달하여 성리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이 계통만을 가리키고 있다.

성리학은 중국 당 말(唐末)이래 귀족사회가 붕괴되면서 일어난 혼란을 당시에 성행했던 도교와 불교의 사상적 약점에서 찾고, 유학의 재건부흥을 통해 극복하고자 했던 데서 출발했다. 따라서 유학의 장점으로 강조되는 윤리와 경세사상(經世思想)이 담겨 있는 가 중시되는 한편, 불교·도교의 영향을 받아 우주·자연 및 인성(人性)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구가 깊어졌고 심성 수양이 철저해진 경향을 보인다. 또 형이상학적 이론과 수기(修己)의 이론이 많이 담겨있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 가장 중요한 기본경전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언제 들어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체로 고려 인종 전후(11~12세기)로 짐작되며, 주자학으로서의 성리학은 충렬왕 때(13세기 후반) (安珦), (白頤正)에 의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李齊賢)·(李穡)·(鄭夢周)로 이어지면서 성리학이 전문적으로 연구되는 수준에 이르고, 아울러 성리학을 정치의 학문적, 사상적 토대로 이용하며 수용하는 단계로 접어든다. 성리학이 한국적으로 변용 또는 발전하게 되는 것은 조선건국 이후의 일이다. 특히 ·권근 등이 성리학에 입각하며 조선건국의 합리화를 위한 이론을 세움으로써, 이후 성리학은 조선사회의 통치이념으로서 관학(官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조선의 기틀이 자리잡은 15세기 중엽부터 약 1세기 동안 학자들에 의해 의리의 실천이 강조되면서, 한국성리학은 실천성리학으로서 도학의 특색을 가지게 되었다.

성리학이 의리실천 차원을 넘어서 이론의 탐구가 본격화된 것은 16세기부터였으며, 특히 ·가 대표적인 학자였다. 이들이 남긴 「4단7정(四端七情)에 대한 이기해석론」이 그 대표적인 주제로서, 이후 학계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주리파(主理派)·주기파(主氣派)로 학파까지 형성되기에 이른다. 이것은 중국성리학의 연구수준을 넘는 것이었고, 한국성리학의 특징이었다. 16세기 말부터는 예(禮)에 대한 의식이 고조되어 예의 실천여부가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었으며, 예송(禮訟) 형식이 당쟁의 명분이 될 정도였다. 이 시기 한국성리학의 특징은 주자학이 거의 교조주의적으로 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17세기경부터는 주자의 이론과 조금만 달라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탄압되어, 같은 성리학인 양명학조차 이단으로 철저히 배척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