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

서원

[ 書院 ]

시대명 조선

조선 중기 이후 사림들이 학문연구와 선현제향(先賢祭享)을 위해 설립한 사설교육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기관.

그 기원은 중국 당나라 말기부터 찾을 수 있지만, 특히 송나라 주자(朱子)가 백록동서원을 열고 이를 보급한 이래 성행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1543년 풍기 이 고려 말 학자 (安珦)을 배향하고 유생을 가르치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세운 것이 그 효시이다. 서원 설립의 배경은 조선 초 이래 계속 되어온 사림의 향촌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사림들은 향촌사회에서 세력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일찍부터 (社倉制), (鄕飮酒禮) 등을 개별로 시행해왔으나, 시대의 거듭된 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교육과 교화를 표방함으로써, 향촌활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구심체로서 서원을 세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서원설립의 직접 계기는 중종대 사림이 정계에 재진출하면서 그 정책으로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교학체제의 혁신을 제시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문묘종사란 의 중용성을 깨우치고 숭상하기 위해 도학에 뛰어난 학자를 문묘에 제향한다는 것으로, 사림계 유학자인 · 등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이는 그 자체가 사림계의 학문적 우위성과 정치입장을 강화해주면서 동시에 향촌민의 교화라는 명분을 가지는 것이었다. 서원이 정착, 보급된 것은 에 의해서이다. 그는 풍기군수로 임명되자, 서원을 공인하고 그 존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지원을 요청했으며, 10여 곳의 서원건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짓는 등 그 보급에 주력했다. 그 결과 이황의 거주지이며 그 문인의 활동이 활발하던 경상도 지역에 전체 서원의 반 이상이 세워졌다.

초창기 서원은 지방관의 적극적인 도움 아래 향촌유지를 중심으로 서원전(書院田)과 어물(魚物)·소금 등 현물의 영속적인 조달체제를 갖춤으로써 안정된 재정기반을 마련했고, 이러한 건전한 운영을 바탕으로 명종 말·선조 초 사림의 공급이 활발할 수 있었다. 서원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선조대에 사림계가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면서부터이다. 선조 이후 현종 때까지 100여 년간 193개가 세워졌고, 그 가운데 이 절반이었다. 지역도 경상도 일변도에서 벗어나 차츰 다른 지방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는 당시 의 전개와 깊은 관련이 있다. 붕당은 사림의 집권과 함께 비롯된 것으로, 당파형성에서 학연(學緣)이 거의 절대적이었고 학연의 매개체로 서원이 이용되었다. 따라서 각 당파는 서원을 세워 그 지역의 사림과 연결을 맺으려 애썼으며, 숙종 때에 세워진 서원만 해도 166개나 되었다.

이렇게 서원이 남설되면서 제향인물도 뛰어난 유학자라는 원칙이 무너지고, 정쟁에 희생된 자기파 인물의 신원이나 후손에 의한 조상제향을 뜻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서원에 대해 적극적인 통제가 시작된 것은 1703년(숙종 29)부터이다. 그 뒤 13년에는 이후 서원의 추가 설립을 금하고 사액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41년(영조 17)에는 14년 이후 세워진 서원은 물론 모든 제향기구를 없애도록 했다. 이러한 강경책으로 서원에 대한 지방관의 도움이 거의 끊어지자, 이를 메우기 위한 민폐가 심해졌고 재정을 담당하는 후손의 서원 관여 역시 조장되었다. 그 결과 19세기 이후 서원은 대부분 후손이 세우고 운영하는 경향을 보인다. 은 1868년과 70년(고종 7)에 제향자의 후손이 주도하면서 민폐를 끼치는 서원의 철폐를 명령했으며, 71년에는 1인 1서원 이외에 중복되는 서원을 모두 없애게 한 결과 전국에 47개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