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파

사림파

[ 士林派 ]

시대명 조선

16세기 기(士禍期)에 또는 훈신·척신 계열과 대립한 재야사류(在野士類)를 배경으로 한 정치세력.

사림이란 용어는 고려 말·조선 초에도 가끔 쓰였으나, 이후 사화가 거듭되면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집단성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사림파란 용어는 근대역사학 성립 이후에 쓰이기 시작했다. 이병도가 <국사대관>에서 조선 전기의 문인 학자를 훈구파, 절의파(節義派), 사림파, 청담파(淸談派) 등으로 구분한 것이 대표적이다. 고려 말 성리학자 길재(吉再)에서 그 연원을 찾으며, 그의 학통을 이은 를 거쳐 을 사종(師宗)으로 삼고 있다. 이때의 사림은 거의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가, 중종대에 (趙光祖)가 중앙에 진출하면서 기호지방 출신도 많이 포함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서 사림의 집단성이 부각된 것은 그간 교육제도의 발달로 지배신분층의 저변인 재지 중소지주층의 지식인화가 촉진되고, 이들이 모두 관직으로 진출하지는 못하더라도 제를 통해 일정한 자격을 받은 수가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들의 교육은 관학보다는 사학인 서재(書齋), (書院)을 통한 경우가 많았다. 사림파는 송대(宋代) 신유학 가운데서도 향촌지주의 사회적 역할을 중요하게 여기는 정주을 선호했으며, 성리학의 목표인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달성하기 위한 교과서로서 소학(小學)> 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16세기에 사림은 정치적으로 훈신·척신 계열과의 대립 속에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규합되었으나, 16세기 말 선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관료로의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학연에 따라 여러 정파로 나뉘는 변화가 일어났다. 흔히 붕당(朋黨)으로 표현되는 정파의 분립은 공도(公道)의 실현을 위해 정파간의 상호견제가 필요하다는 신유학의 새로운 붕당관으로 뒷받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