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전

적전

[ 籍田 ]

시대명 조선

고려 및 조선시대에 왕이 친경(親耕)하여 그 수확으로 신농(神農)·후직(后稷)에게 제사하기 위해 국가 공유지에 설정한 토지.

신농은 농사의 신이며 후직의 「후」는 토지의 신, 「직」은 곡물의 신으로 이들에 대한 제사는 그해의 풍작을 빌기 위한 것이고, 또한 왕의 친경을 통해 농경의 시범을 보인다는 권농(勸農)의 의미도 갖는다. 이 두 가지 의미는 본래 별개의 것이 아니라 원시 공동경작시대에 생산지도자로서 추장의 위세를 꾸미는 자연발생의 계절의식이었는데, 후에 직접생산자에서 분리된 주권자의 은혜적인 의식으로 바뀐 것이다. 중국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제실의식(帝室儀式)의 하나였으며, 우리나라에서는 983년(고려 2)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에도 비슷한 형태가 있었으나, 고려시대 선농단(先農壇)과 적전을 두면서부터 조선시대와 같은 형식을 받아들였던 것 같다. 조선에서는 권농을 중시하는 흐름 속에서 더 깊은 의의를 갖게 되었다.

적전은 중농사상을 표현한 하나의 상징이므로, 왕의 친경은 형식적인 의례(儀禮)였고 실제로는 적전에 붙어 있는 (公奴婢)와 주변의 농민들이 경작했다. 또 그 면적도 그다지 넓지 않았다. 조선 태종대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말 권신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의 토지를 몰수해 개성 보정문(保定門) 밖에서 서적전(西籍田) 약 300결을 설치했고, 한성에는 흥인문 밖에 동적전(東籍田) 약 100결을 설정했다고 한다. 서적전은 관리가 허술하여 세종대에 대부분 민간에 넘어갔고, 이후 동적전만 계속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