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상

보부상

[ 褓負商 ]

시대명 조선

전근대사회에서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을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를 매개했던 전문상인. 봇짐장수인 보상과 등짐장수인 부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

본래는 별개의 조직체였는데, 1883년(고종 20)에 설치된 혜상공국(惠商公局) 아래 합쳐지면서 「보부상」으로 통틀어 일컫게 되었다. 보상은 주로 정교한 세공품이나 값비싼 사치품을 취급한 반면, 부상은 조잡한 일용품 등 가내수공업품을 취급했다. 보상은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팔았고, 부상은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았다. 대개 1일 왕복의 노정을 표준삼아 형성된 시장망을 돌면서 각 지방의 물화(物貨)를 유통시켰다.

보부상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부상단(負商團)이 조직된 것은 조선 초로서, 이에 관해서는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에 공헌했기 때문에 그 조직을 허용했다는 설과, 이와는 달리 상류계층과 무뢰한의 탐욕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했다는 설이 있다. 보상단(補商團)에 관해서는 79년(고종 19)에 발표된 「한성부완문(漢城府完文)」에 의해 알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 이전부터 지역마다 각기 정해진 규율과 두령인 접장(接長)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보부상은 국가의 일정한 보호를 받는 대신, 유사시에 동원되어 정치활동을 수행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수천 명의 부상이 식량과 무기를 운반했을 뿐 아니라 전투에도 직접 참여하여 왜군을 물리치는 데 공헌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부상들이 식량을 운반해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정부에서는 이들의 요구대로 생선·소금·목기·토기·수철기(水鐵器)에 대한 전매권을 허락했다.

66년 병인양요 때는 전국의 보부상이 동원되어 프랑스군을 무찔렀으며, 82년에는 민영익(閔泳翊)이 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불만을 품고 경기도와 강원도의 보부상을 이끌고 서울로 침입한다는 소문이 있어 도성 내에 큰 혼란이 일기도 했다. 또 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보부상은 정부군에 합세하여 농민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당시 주축이 되었던 것은 충청우도(忠淸右道) 저산팔구(苧産八區)(모시를 생산하는 8읍 : 부여·정산(定山)·홍산(鴻山)·임천·한산·비인·남포·서천)의 보부상들이었다. 그 후 황국협회에 속하기도 했다가 여러 변천과정을 겪은 끝에, 일제강점과 더불어 일제의 보부상 말살정책에 의해 거의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