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

진상

[ 進上 ]

시대명 조선

고려 및 조선시대 관민(官民)이 왕실과 국가의 제사를 위해 예물을 바치는 것.

세공(稅貢)과는 별도로 제사에 사용되는 공물(供物)과 왕실에 대한 공상(供上)을 그 지방의 생산물에 따라 바치도록 해, 이를 중앙의 여러 관청에서 관장했다. 고려 이후부터 행해졌으나 고려의 것은 자세히 알 수 없고, 조선에서는 물목(物目)·수량·상납기한 등을 상세히 규정, 세공과 거의 다름없이 부과했다. 그 명목은 크게 물선(物膳)·방물(方物)·제향천신(祭享薦新)·약재(藥材)·응자(應子) 등과 별례진상(別例進上)으로 나뉜다.

① 물선진상은 매월 정기적 또는 부정기적으로 음식료품을 왕실에 바치는 것이다. 처음에는 지방관이 임의로 징수했으나, 1419년(세종 1) 각 지방관이 을 차사원(差使員)으로 삼아 정해진 날짜에 물목의 송장(送狀)과 물선을 사옹방(司饔房)에 상납하도록 규정했다.

② 방물진상은 명일(名日)방물과 국왕의 행차 때 바치는 행행강무(行幸講武)방물 등이 있다. 명일이란 명절(동지·정조(正朝)·성절(聖節))과 절일(節日, 축일(祝日))을 말하는데, 이때 갑주(甲冑) 등의 병기(兵器), 모피·기구(器具)·백포(白布) 및 산해진미를 바쳤다. 왕이 선왕의 왕릉참배, 온천목욕, 또는 「강무」라 하여 수렵을 위해 지방에 나갈 때도 그 지역의 가 방물을 바쳤다.

③ 제향천신진상은 시절제사(천신)을 비롯해 왕실의 각종 제사에 필요한 것을 바치는 것이다. 원래 제사에 필요한 물품은 중앙 각 기관에 맡겨, 양이나 돼지는 전농시(典農寺)·내자시(內資寺)·전구서(典廐署)가, 채소류는 침장고(沈藏庫)가, 과실류는 상림원(上林園)·(惠民署)·양현고(養賢庫)·내자시 등이 진상하도록 되어 있는데, 담당관청이 마련할 수 없는 것은 지방 각 관에 분담시켰다.

④ 약재진상은 전의감(典醫監)·혜민서··동서 등 중앙 의료기관에 지방에서 나는 이른바 「향약(鄕藥)」을 채취·상납하게 한 것이다. 지방관은 의원(醫院)·의생(醫生)·채약인(採藥人, 약부(藥夫))·약포(藥圃)를 두어 향약을 채취하게 했는데, 채약인은 약재에 대한 지식, 채취 및 건조 등 특별한 기술을 익혀야 하므로 정역호(定役戶)로 하여 세습제로 했다.

⑤ 응자진상은 고려 후기 이래 설치된 (鷹坊)에서 중국에 대한 공물 또는 왕의 수렵에 필요한 매를 바치는 것이다. 응방에는 응인(鷹人)을 두어 매를 잡거나 기르도록 했는데, 이들 역시 특별한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므로 대개는 가업(家業)으로 세습했다.

특수한 물품의 진상이 세습적으로 강요된 정역호로는 소목군(燒木軍)·공염간(貢鹽干)·응사(鷹師)·약부·생선간(生鮮干)·생안간(生雁干)·해작군(海作軍, 어호(漁戶)) 등이 있으며, 이들은 정부기관에 예속되어 역으로 맡은 직무에 종사해야 했다. 그러나 진상물자의 분정(分定)은 전적으로 지방관이 맡았기 때문에 일반 민호에 그 부담이 전가되기도 했다. 이 실시될 때에도 진상은 현물로 바쳐졌는데, 진상의 품목은 대부분 부패하기 쉬운 식료품이어서 까다로운 규정이 뒤따랐고, 이에 관리들의 협잡이 심해 백성들의 피해가 컸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상은 민호 수탈의 도구로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경제적으로 끼친 영향 중 주목할 만한 것은, 교환거래의 촉진 및 물자의 상품화와 아울러 를 포함한 이서(吏胥) 또는 의 상인화의 기초를 마련하고 그 세력을 키우는 데 이바지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