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품제

전품제

[ 田品制 ]

시대명 조선

중세사회에서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 제도.

우리나라 중세의 토지제도는 결부제(結負制)에 의해 운영되었는데, 여기서 전품의 구별은 단위면적의 소출과 의 양을 산정하고 국가의 부세 및 농민의 담세를 균평하게 조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또 지배층에게 토지((收租權))를 분급한 경우 그들의 수입과도 직결된 문제였다.

통일 및 고려시대 전품제는 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어 다소 논란이 되고 있다. 대개의 기록에서 상·중·하의 3등분으로 구분했다고 하고, 1054년(문종 8)의 규정에도 불역전(不易田, 해마다 경작)은 상등, 일역전(一易田, 격년으로 경작)은 중등, 재역전(再易田, 3년마다 경작)은 하등전으로 한다고 되어 있어 대체로 3등분의 전품제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駕洛國) 수로왕릉묘(首露王陵廟)의 왕위전(王位田)을 「상상전(上上田)」으로 표현한 것에서 전품의 등급이 단순히 상·중·하로 나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고려 전기의 전품은 농지 비옥도에 따라 각 지역을 상·중·하로 나누고, 다시 그 지역을 1054년의 규정처럼 세역(歲役)의 빈도에 따라 3등분함으로써 9등분의 전품제를 실시했던 것이다. 아직 모든 농지가 연작 상경화(連作常耕化)되지 못하고 일부는 휴한(休閑) 세역농법으로 경작되고 있었기 때문에, 농지의 지력(地力), 즉 비옥도와 관련된 세역이 전품의 기준이 되었다. 상등지역의 상등전(불역전)은 1결의 소출이 쌀 약 315두(斗, 21석(石))로 계산되는데, 상등지역은 아마 하삼도(下三道)나 곡창지대인 호남·영남지방이었을 것이며 이 지역의 불역전이 1결 소출량의 기준이 되었던 것 같다.

전품제가 다시 조정된 것은 여말선초 의 조세개정 때였다. 전품을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상·중·하의 3등급으로 구분하고, 각각 「수지척(手指尺, 농부의 손마디 길이)」을 기준으로 20 : 25 : 30의 차등을 둔 상전척(上田尺)·중전척(中田尺)·하전척(下田尺)으로 (量田) 하여, 모두 1결에 1/10세인 30두씩 동일하게 수조하도록 했다. 즉 전품에 따라 1결의 면적이 달랐고 1결당 수조액은 같았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 후기 이래 농업생산력의 꾸준한 발달로 대부분의 토지가 상경화 된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하여 토지의 면적단위이면서 동시에 수확·수세단위를 표시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이 정립됐다. 1결의 실적(實積)을 척관법(尺貫法)으로 환산하면 대략 상등전이 1,846평, 중등전이 2,897평, 하등전이 4,184평 정도였다. 그러나 전품의 분등을 다만 도(道) 단위로 달리 실시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토지가 하등전에 속해 생산력에 상응하는 수취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1444년(세종 26) (貢法) 세제로 개정되어, 각도의 전품을 6등급으로 나누고 각 전품의 실제 수확량을 근거로 각 전지의 소출을 조절했다. 양전의 척도도 보다 정확한 중국의 주척(周尺)으로 고쳤다. 수조율은 과전법처럼 등급에 상관없이 동일했으나 그 비율은 1/20세인 20두로 바뀌었다. 또 전품제를 보완하기 위해 연분법(年分法)을 도입, 풍·흉년의 손실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수세액을 조절했다. 공법의 전품은 조선 초기 과학기술의 발달을 토대로 그 원리나 기준이 꽤 합리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수확을 표준으로 하는 결부법에 의해 운용되었기 때문에 전품의 분등과 연계된 실적을 산출하는 데 객관적인 명확성을 가지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