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부상

보부상

[ 褓負商 ]

시대명 근대/개항기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를 합친 이름. 이후 자연경제의 기반 위에 농업생산자·가내수공업자(家內手工業者)·시장상인 등과 소비자 사이에 물물교환을 이어주던 행상인으로서, 토기 같은 잡다한 일용품을 지고 다니는 부상(負商)과 장식품 등 세공품을 팔러다니는 보상(褓商)을 함께 일컫는다. 고려 말기의 공양왕 시대에 보부상을 시켜 소금을 운반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조에 들어 이성계의 건국에 많은 협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1592년(선조 25) 때는 수천 명의 보부상이 동원되어 행주산성의 에게 양식을 조달해주었으며, 1894년(고종 31) 혁명 때는 엄순영·송학헌 등이 수백 명의 보부상을 동원, 동학군의 토벌에 공을 세웠다.

국내의 각 시장 장날을 따라다니며 장사를 하는 이들은 엄한 규율과 신의를 바탕으로 하여 강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정치적 변혁기에 집권세력에 의해 이용당하는 일이 많았다. 구한말인 1898년 (皇國協會)가 보부상의 조직을 이용, 를 깨뜨리는 데 이용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보부상의 길드적 조직은 조선 초부터 형성된 듯하며, 몇 개의 임방(任房)이 있었으나, 후기에 더욱 조직화되어, 1866년(고종 3) 보부청(褓負廳)이 설치되어 전국의 보부상을 통합했다. 이어 83년에는 혜상공국(惠商工局)을 설치하고 여기에 보부청을 통합시켜 군국아문(軍國衙門)의 관할을 받게 했다. 85년 혜상공국이 상리청(商理廳)으로 개칭되면서 부상을 좌단(左團), 보상을 우단(右團)이라 하고, 99년( 3) 상리국의 좌·우단은 상무사(商務社)에 이속되어 좌단은 좌사(左社), 우단은 우사(右社)로 개칭했다. 후에 상무사는 진흥회사(進興會社)로 개칭되어 보부상 활동을 확장하려 했으나 그다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