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명성황후

[ 明成皇后 ]

시대 근대/개항기
출생 - 사망 1851년(철종 2년) ~ 1895년(고종 32년)
본관 여흥(驪興)
이명 시호 : 명성(明成)

고종의 비. 성은 민씨, 본관은 여흥(驪興). 여주(鷹州) 출신. 9살 때 부모를 여의고 여주의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차츰 대원군과의 사이가 틀어져서 대원군 반대파를 규합, 민씨척족들을 정부요직에 앉혀 세력기반을 다져가는 한편, 등 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유림의 거두 을 앞세워 대원군을 탄핵, 하야시킨 다음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케 하고, 을 폐해 과 수교했다.

82년(고종 19) 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변복을 하고 궁궐을 탈출, 충주 장호원(長湖院)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민비의 요청으로 청군이 출동하여 군란이 진압되자, 대원군을 청나라로 납치해가도록 일을 꾸미고 다시 민씨정권을 일으켰다. 84년(33세) 으로 민씨일족이 실각하자 다시 청나라의 개입을 불러들여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으나, 일본세력의 침투로 등의 친일내각이 들어서고 94년 대원군의 재등장으로 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에 접근, 일본세력을 몰아내려 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을 일으켜, 95년(44세)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정치깡패들을 경복궁에 침입시켜서는 민비를 살해하고 시체마저 석유를 끼얹어 불살랐다. 그 후 민비는 폐위되어 이 되었다가 97년( 1) 명성(明成)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그해 11월 국장이 거행되어 청량리 밖 홍릉(洪陵)에 장사지냈다. 19년 고종이 돌아가자 양주군 미금면 금곡리 홍릉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