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신분계급

조선의 신분계급

[ 朝鮮-身分階級 ]

시대명 근대/개항기

신분계급이란 일정한 사회에서 권력적 지배의 우열 및 경제관계에서 유래되는 세습적인 상하관계, 지배·피지배관계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집단을 말한다. 조선의 신분계급은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어려우나, 크게 양반·중인(中人)·상민(또는 상인(常人)). 천민의 4계급으로 나누어진다.

1. 양반

양반은 가장 높은 신분으로 조상의 혈통을 기준으로 해서 사대부(士大夫)출신을 일컫는데, 이들은 사회의 특권층으로서 나라로부터 토지 기타 특전을 받았다. 유교를 숭상하여 업으로 삼고 아무 제한 없이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으며, 실제로 나라의 중요한 관직을 독점, 정치적 특권층을 형성했다. 또한 학문과 예의를 존중하는 지도적 계급으로서의 정신적 의무도 지고 있었던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여, 각지에 많은 농토를 가진 부재지주였다.

2. 중인

중인은 양반 다음 가는 신분층으로, 그 명칭은 서울의 중앙부에 거주지역을 삼은 데서 비롯되었다. 양반이 천인계급의 대두를 막기 위한 외벽(外壁)으로서 취재(取才)라는 특수한 시험으로 등용되었는데, 이들의 전통이나 교양은 양반계급에 못지않았으나, 관직은 의(醫)·역(譯)·주(籌, 산학(算學))·관상(觀象)·율(律)·혜민(惠民)·사자(寫字)·도화(圖畵) 등 기술사무직에 한정되고, 벼슬은 한품서용(限品叙用)의 규정에 따라 제한되어 대개 하급관리에 임명되었다. 중인은 그들이 가지는 지식의 특이성을 고수, 다른 계급의 모방을 허락치 않을 뿐더러 결혼은 반드시 같은 계급끼리 했으며, 기술은 세습되고 따라서 관직도 계승되어 굳은 의식과 조직적인 계급을 형성했다. 이와 같이 중인계급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 역관(譯官)과 같은 것은 사대교린에 관계한 만큼 세력이 매우 컸으며, 한편 문학에 있어서도 양반을 능가하는 일이 있었다.

3. 상민

상민은 백성·상사람·또는 양인(良人) 등으로 불리었으며, 보통 농·공·상에 종사하는 생산계급으로서, 납세·공부(貢賦)·군역(軍役) 등의 전면적인 담당자였다. 상민의 대다수는 농업에 종사했지만, 자신은 토지를 가지지 않고 국가 또는 양반의 토지에 대한 경작권만을 가졌을 뿐으로, 그 경제적 지위는 농노와 비슷했다.

4. 천민

천민은 천역에 종사하는 가장 낮은 신분으로서 노비·백정·창우(倡優, 배우)·승려·무격(巫覡) 등이 있었다. 그중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노비로서, 관청에 딸린 공천(公賤)과 매매나 양도로 개인에게 소속된 사천(社賤)으로 구분되었다. 이들 노비는 사회적으로 가장 많은 제약을 받았으며, 주인을 세습적으로 섬기는 것이 원칙이었다. 백정은 고려 때의 양수척(楊水尺)·수척·화척(禾尺) 등을 1423년(세종 5)에 고친 이름으로서, 천민 중에서도 가장 멸시받는 신분이었다. 승려는 조선조에 들어 불교의 쇠퇴와 함께 천민층으로 변했으며, 무격은 남자를 박수, 여자를 무당이라 했는데, 창우와 무당이 결혼하는 일이 많았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신분계급은 대단히 엄격하여 커다란 사회적 모순으로 작용, 갖가지 폐단을 일으켰으며, 정치·경제의 체제는 이 신분제도를 중요한 기초로 삼았다. 그러나 1895년(고종 32) 갑오개혁 이후 신분제도를 폐지, 양반과 평민의 계급을 타파하고, 백정·광대 등의 천민신분을 폐지했으며, 공사노비의 제도를 혁파하고 인신매매를 금지했다. 그 후 신문화의 수업과 민중적 자각에 의해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남아 있던 유습마저 차츰 사라졌다.

평양기생학교

평양기생학교 기생은 천민에 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