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사변

을미사변

[ 乙未事變 ]

시대명 근대/개항기
연도 1895년(고종 32년)

1895년(고종 32) 10월 8일 공사 미우라(三浦梧樓) 등이 친로세력을 없애기 위해 민비(閔紀, (明成皇后))를 살해한 사건.

에서 이긴 일본이 조선에 대해 더욱 노골적으로 침략성을 드러내다가 가 주도한 으로 기세가 꺾임에 따라, 외국세력의 동향에 민감한 민씨일파는 급히 친로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면서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친로파인 이범진· 등을 중심으로 제3차 내각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이노우에(井上馨) 공사를 소환하고 군출신인 미우라를 공사로 보내 세력만회의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대원군과 손을 잡고 10월 8일 새벽을 기해 민비살해 계획을 결행했다.

미우라는 대원군을 앞세우고 일본인 정치깡패(浪人)들을 지휘, 경복궁으로 쳐들어가 대신 이경식·연대장 홍계훈 등을 살해한 다음, 왕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민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후 뒷산에 묻었다. 그리고 고종을 위협하여 내각을 몰아내고 ·서광범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케 했다.

그러나 이 변란은 국제적으로도 커다란 물의를 일으켜, 일본은 미우라와 그 일당 48명을 소환,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가두고 형식적으로 재판하더니 결국 증거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시켰다. 이 변란 뒤에 들어선 새 내각은 광범한 개혁에 나서, 음력의 폐지, 종두법 시행, 우편제도 실시, 건양(建陽) 연호 사용, 시행 등을 급진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민비의 참변과 단발령은 민심을 크게 어지럽혀 각처에서 의병의 봉기와 (俄館播遷)을 불러와 일본의 조선침략계획에 큰 타격을 준 반면, 조선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