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밀사사건

헤이그 밀사사건

[ -密使事件 ]

시대명 근대/개항기

1907년(융희 1) 이준·이상설·이위종 등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출석, 을사조약 체결이 한국황제의 뜻에 반해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진 것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하려 했던 사건.

1905년 일제가 고종을 비롯해서 각료들을 위협,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다음, 이에 따라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등 노골적인 병탐을 꾀할 즈음,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40여 개국 대표가 참석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4월에 고종은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주어 만국회의에 나가 우리 실상을 만천하에 고하도록 했다. 이상설은 전 평리원검사(平理院檢事) 이준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레닌그라드)에 도착, 전 러시아 공사관 서기 이위종을 데리고 회담 개최 며칠 전에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러나 회의 자체가 열강이라는 <큰도둑들의 만찬회>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과 영국 등의 집요한 방해와 열국의 방관으로 인해 우리 대표들은 회의참석과 발언을 거부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네덜란드 언론인 W. 스테드의 주선으로 한국대표들은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어, 노어·불어·영어 등에 능통한 젊은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들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게 되었다. 그 연설 전문은 <한국을 위해 호소한다>라는 제목으로 세계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는 못했으며, 이에 이준은 울분을 삭이지 못한 채 그곳에서 분사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7월 20일 양위식을 강행했다. 이에 흥분한 군중은 친일단체 일진회의 기관지를 내는 <국민신문사>와 경찰서 등을 파괴하고, 친일괴수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격렬한 항일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에 아랑곳없이 7월 24일에는 일제의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위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성립시킨 데 이어,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을, 29일에는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31일에는 한국 군대 해산명령을 각각 공포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도 광무(光武)에서 융희(隆熙)로 바뀌었으며, 전국 각지에서는 일제에 항쟁하는 정미의병(丁未義兵)이 일어나는 가운데 일제는 한국병탐의 마지막 작업을 서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