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장지연

[ 張志淵 ]

시대 근대/개항기
출생 - 사망 1864년(고종 1년) ~ 1921년
본관 인동(仁同)
이명 : 순소(舜韶)
: 위암(韋庵)
직업 언론인, 우국지사

구한말의 언론인·우국지사. 자는 순소(舜韶), 호는 위암(韋庵), 본관은 인동(仁同). 경북 상주(尙州) 출신. 1894년(고종 31) 가 되고 1907년 때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萬人疏)를 기초했다. 통정(通政) 등을 지냈으나 98년 사직한 후, ·유근(柳護)들과 일간신문 황성신문(皇城新閒)>을 창간, 민중계몽에 힘쓰는 한편, 사업에도 참여, · 들과 를 열기도 했다. 1902년( 6) 3월부터 <황성신문> 사장직을 맡아 독립정신 고취에 분투하던 중, 1905년 11월 17일 이 체결되자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의 비분에 찬 논설을 실어 서울 장안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논설의 요지는 「동양 3국의 평화를 솔선주선하기로 나선 이토가 천만 꿈 밖에 어찌 5조약을 내놓았는가. 개가 죽을 쓴 우리 대신들은 일신의 영달만 위해 황제폐하와 2천만 동포를 배반하고 4천년 강토를 외인에게 주었도다. 슬프다! 우리 2천만 동포여, 살아야 할 거나, 죽어야 할 거나」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장지연은 그날로 관헌에게 체포되어 3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후, 1906년 윤효정·나수연 들과 (大韓自彈會)를 조직, 구국운동을 벌이다가 이 회마저 해산당하자 190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주필이 되었다. 경영난으로 신문이 폐간되자 중국과 시베리아를 유랑하다가 10년 귀국, 진주(晉州) 주필로 취업하고, 이듬해 8월 29일 이 되던 날 (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 이로 인해 <경남일보>는 폐간되었다. 그 후 실의에 찬 생활과 친일로 오가다가 병을 얻어 죽었다. 저서에 등이 있고 호은율사(虎隱律師)의 제자로서 율사가 입적하자 「호은대율사비문(虎隱大律師碑文)」을 찬하였다. 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