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천도교

[ 天道敎 ]

시대명 근대/개항기

조선 말기에 수운(水雲) (崔濟愚)가 창도한 (東學)을 제3대 교조 가 개칭하여 재건한 종교. 1894년 동학혁명이 실패하고 4년 후에는 제2대 교조 마저 체포되어 순도함으로써 동학은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더욱이 1900년 지도급 인물인 손천민(孫天民)·김연국(金演局)이 체포되어 손천민이 순도하자 위기를 느낀 손병희는 망명길에 나서 상해와 등지를 전전하면서 재건의 기회를 노렸다. 그동안 국내에는 일본이 세력을 키워가자 교회 지도자인 (李容九)는 동학의 기반을 이용하여 진보회(進步會)를 조직, 의 (一進會)와 합하여 노골적인 친일행위를 자행했다.

이에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에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교회재건에 착수 2월에 천도교 중앙총부를 서울에 설치하고, 9월에는 이용구를 포함한 교도 62명을 출교처분했다. 10년 으로 나라의 주권을 뺏기자 종교적 수행을 강화시키는 한편, 보국안민이란 깃발 아래 민족해방운동을 추진했다. 국민 교육을 위해 800개의 강습소를 설치, 기본교육에 힘썼으며, 보성전문·동덕여학교 등을 경영·보조하는 등 교육사업을 펼쳐나갔다. 19년 에서 천도교는 기독교계·불교계·학생들과 함께 독립을 위한 대민중시위를 주도했으며 개벽(開闢)> <신여성> <어린이> <농민> 등의 잡지를 간행, 문화·여성·을 꾸준히 계속 해나갔다.

35년 이후부터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 거의 침체기에 빠졌지만, 이 무렵 천도교 청년들은 오심당(吾心黨, 1922)을 조직 35~36년 조선 독립운동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많은 인사가 체포·구금되었으며, 38년에는 제4대 교주 박인호(朴寅浩)가 주도한 이 발각되어 수십 명이 체포·구금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