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과 민족항쟁

일제강점과 민족항쟁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시대명 근대/일제강점기

1910년 이래 주권은 물론 일체의 정치적 자유와 최소한의 생존권조차 박탈당했던 35년간이라는 세월은, 일제가 지배한 역사라는 의미에 주안점이 있는 <일제식민지시대사>로서가 아니라, 그러한 지배에 항거해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참다운 자주독립국가의 건설을 위해 싸워나가는 <민족해방투쟁사>로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1910년대는 일제가 조선을 철저하게 식민지로서 수탈하기 위해 행정•경제•사회•문화적 기반을 마련해가던 시기였다. 특히 1910년부터 18년까지 진행된 은 근대적 토지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목하에 광대한 구왕실 토지와 공유지를 총독부의 수중에 집중시켰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지주의 소유권을 승인하고 다수 소작인의 경작권을 전면 부정함으로써 수많은 농민의 몰락을 초래했다. 이는 총독부 자신이 거대한 지주로서 조선의 지주들의 이익을 일정 정도 보장하여 지주를 친일화하고, 인의 자유로운 토지침탈을 마련해주며, 궁극적으로는 조선을 일본의 값싼 식량공급지로 만들기 위한 정지작업이었다. 일체의 정치•문화•군사적 활동을 금하고 공포분위기 속에서 조선 민중들을 노예화시키기 위해 그들이 사용했던 것은 무자비한 폭력, 즉 무단통치였다.

은 이러한 지배와 수탈에 항거해 일어난 전민족적인 식민지해방운동이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독립국가의 형태로서 공화정을 제시하여 근대적 국가상을 제시한 것은 과거 민족운동보다 한걸음 더 전진한 것이었다. 초기에 종교인•지식인•학생들이 주도하던 비폭력적 운동이 점차 노동자•농민에게 주도권이 넘어가면서 폭력적 저항으로 발전해간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10년 이래 일제수탈의 최대의 피해자인 농민과 노동자들의 진출은 다가올 20년대 이후의 민족해방투쟁의 가장 강력한 투쟁주체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폭력투쟁은 식민지독립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비타협적이고 조직화된 무력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미 실천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3•1 운동의 성과는 공화정 형태의 임시정부의 수립과 만주 무장투쟁의 고양으로 이어졌다. 세 개의 임시정부가 합쳐져 만들어진 임시정부는 무장 투쟁노선과 외교중심론의 대립, 지방색과 파벌성에 의한 내부분열로 20년대 중반경에는 일개 독립운동단체로 전락했지만, 만주 조선인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독립군의 활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2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문화통치라는 간교한 지배방식으로 전환한다. 단결된 민족의 힘을 분열시키기 위해 지주뿐 아니라, 이제 막 성장하고 있는 조선의 자본가•지식인층까지 의 품으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조선 자본가들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던 을 철폐하고(이것은 회사령 시행기간 동안 성장한 일본 자본이 조선에 침투하는 것을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 실제 목적이지만), 지방자치제의 도입으로 지식인•자본가•지주 등 유지급을 식민통치구조에 끌어들이며, 신문의 발간, 부분적인 집회•결사의 자유를 허용함으로써 친일 내지 개량화로 유도했다. 개량화된 지주•자본가•지식인들은 조선의 독립이 아니라 참정권허용운동이나 직접적인 투쟁과는 직결되지 않는 문화사업을 독립운동인 양 들고나오면서 민족운동의 전선을 내부로부터 분열시켰다.

또한 20년대 초부터는 사회주의사상이 유학생•지식인 중심으로 국내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1917년 혁명의 성공과 민족독립문제에 대한 소련의 적극적인 태도는 조선 지식인들의 사상적 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0년대 급격히 성장한 노동자와 농민은 일제•지주•고용주와의 투쟁 속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중심세력으로 뿌리내렸다. 나 등은 이 시기의 농민•노동자투쟁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었다. 문화정치>라는 개량화 술책에도 불구하고 이들이야말로 제국주의에 대한, 그리고 일체의 억압에 대한 가장 단호한 투쟁자라는 것을 역사 속에서 입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생들 또한 식민지 노예교육과 제국주의의 지배에 맞서 활발한 투쟁을 벌였는데, 사회주의 세력의 영향하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투쟁의 불을 당긴 이나 은 전민중이 참여하는 대중투쟁으로까지 발전했다. 20년대 중•후반은 개량적•친일적 세력을 제외한 민족해방운동세력이 협동전선을 펼쳐 일제와 싸우던 시기였다. 는 개량주의와 맞서면서 고양되어가는 대중투쟁을 단일한 반일투쟁역량으로 지도하기 위해 꾸려진 최초의 좌우협동단체라고 할 수 있다.

31년 일제의 , 37년 중국침략, 41년 으로 이어지는 30~45년까지의 시기는 20년대 후반 세계 이후 심각한 위기를 맞은 일제가 타국의 침략을 통해 모순을 해결하려는 시기다. 따라서 한반도는 일제의 식량 공급지이자 동시에 전쟁자원 조달처로서, 조선의 청장년은 이나 으로, 처녀들은 로, 남은 사람들은 물자의 조달자나 군수관련공장의 저임노동자로, 각종 노역과 군사훈련 및 강제동원에의 희생을 강요당했다. 동시에 일제는 조선어 사용금지•• 등 완전한 식민지노예로 대대로 길들이기 위한 민족말살공작을 자행했다.

한편 이 시기 국내에서는 소위 <민족주의> 계열의 운동은 점차 개량화되어 소멸해가는 반면, 사회주의자들은 공장•농촌 등 생산지역을 중심으로 및 혁명적 노동조합•농민조합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여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투쟁형태로 등장했다. 대부분 활동의 초기단계에서 검거되는데, 함경도 농촌지역에서는 무장대까지 조직하여 파출소를 습격하거나, 몇 년간 투쟁이 지속된 경우도 있었다. 학생운동 또한 지하독서회•비밀결사 등을 중심으로 반전•반제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나갔다. 해외에서는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동북항일연군 한인부대가, 만주와 중국내륙의 접경지구에는 산하 이 일본군과 직접적인 무력항일전을 전개했으며, 임시정부는 을 편성하여 국내침투를 준비했다. 이러한 운동세력은 태평양전쟁의 발발 이후 모두 일제의 패망을 예견했지만, 당시 해외의 독립운동세력이나 국내의 등은 모두 단일한 항일전선을 형성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