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안창호

[ 安昌浩 ]

시대 근대/일제강점기
출생 - 사망 1878(고종 15) ~ 1938
이명 : 도산(島山)
직업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호는 도산(島山). 평안남도 강서(江西)사람. 청·일전쟁이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95년에 상경, 구세학당(救世學堂)에 들어가 기독교인이 되었다. 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평양에 그 지부를 설치하기 위한 만민공동회를 쾌재정(快哉亭)에서 개최, 18살의 나이로 많은 청중에게 감동을 준 연설을 하여 갈채를 받았다. 그 후 서울로 올라와 98년 이상재·윤치호·이승만 등과 같이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00년 미국으로 건너가 신문명을 배웠다. 을사조약 체결의 소식을 듣고 1906년에 귀국, 이갑(李甲)·양기탁·신채호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자강운동을 전개,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정주(定州)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세우는 한편, 서울의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사용하고, 평양과 대구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는 등 교육·문화·산업의 다방면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11년 105인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으로 망명, 1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민족혁명 수양단체로 흥사단을 조직하여 활약하고,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의 내무총장·노동총판 등을 지내는 한편, 흥사단 극동임시위원부를 조직, 임시 정부 육성과 민족계몽을 통한 독립운동에 계속 헌신했다. 32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사건으로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송환당해 대전감옥에서 3년간 복역한 후 가출옥하여 휴양하다가. 37년 6월 동우회(同友會)사건으로 다시 체포되었다. 이듬해 병으로 보석되어 치료받다가 그해 3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도산의 기본사상은 을 기본으로 하고, 자주독립을 이룩하려면 넓은 의미의 교육, 즉 국민운동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무실역행(務寶力行)을 근간으로 하는 도산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흥사단 운동을 통해 민중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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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침략하의 민족수난
안창호 지금 읽는 중
2. 3·1운동과 임시정부
3. 제국주의열강의 대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