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

최익현

[ 崔益鉉 ]

일본헌병에 체포된 최익현.

일본헌병에 체포된 최익현.

시대 근대/개항기
출생 - 사망 1833년(순조 33년) ~ 1906년(광무 10년)
본관 경주(慶州)
이명 : 찬겸(贊謙)
: 면암(勉庵)
직업 문신, 학자, 의병장

구한말의 문신·학자·의병장. 자는 찬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본관은 경주. 경기도 포천 출신. 화서(華西, (李恒老))의 고제(高弟). 조선 말기 유림의 거두로서 문도(門徒) 수천 명을 거느렸다. 55년( 6) 문과에 급제, 전적· 정언 등을 역임하고, 68년(고종 5) 장령(掌令)이 되어, 과 (當百錢) 발행에 따른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의 실정을 상소,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민비일파 등과 연결,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공조참판으로 승진된 후에는 다시 대원군의 실정을 낱낱이 들고 왕의 친정(親政)과 대원군의 하야를 주장, 대원군을 실각시키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75년 풀려나온 후, 이듬해 과의 통상이 논의되는 것을 보자 5개조로 된 격렬한 를 올려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98년 특진관이 되고, 뒤에 의관(議官)·경기도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힘썼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일본으로부터의 금지 등을 상소하고 친일매국도배들을 처단하라고 강력히 요구하다 두 차례나 일본현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했다.

1905년 이 체결되자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고, 납세거부·철도이용 안하기·일본상품 안사기 운동의 전개를 촉구했다. 이듬해 6월 제자 ·임낙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일본의 배신 16조를 따지는 을 배포한 후, 순창에서 약 4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일본군과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對馬島)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임병찬의 권고도 듣지 않고, 「내 늙은 몸으로 어이 원수의 밥을 먹고 더 살겠느냐. 너희나 살아 돌아가 나라를 구하라」하고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 임병찬에게 초하여 올리게 한 후 굶어죽었다. 그의 시체가 본국에 송환될 때 수많은 동포가 부산포구에 나와 통곡하며 맞았다. 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저서에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