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

양명학

[ 陽明學 ]

시대명 조선

명나라 학자인 왕수인(王守仁, 호는 양명(陽明))이 주창한 유학의 한 학풍.

주자학은 봉건질서의 합리화를 꾀했으나 명대 중기 이후 서민층의 대두와 농민반란 등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이에 양명은 「이(理)」란 선천적으로 마음의 가운데 있기 때문에(심즉리(心即理)) 「지(知, 이(理))」의 인식은 「행(行)=실천」과 일체 불가분이며, 「격물(格物)」이란 「지」를 다해 실천을 바로잡는 일(치양지(致良知))이라고 말하고, 「이=체제이념」과 「오(吾)=현실의 모순」을 관념적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그는 먼저 알고 난 후에 실천을 해야 한다는 주자의 주장(선지후행(先知後行))을 비판하고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일체가 되어야 한다고(지행합일(知行合一)) 주장했다. 양명학은 현실의 유교윤리 그 자체에 대해 비판을 가한 것은 아니나, 「이」의 주관화·상대화를 주창해 자연적인 인간의 마음 자체를 중시하고 권위주의적인 이전의 유교를 적대시하는 양명학 좌파를 탄생시켰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 중종 이전에 이미 양명학이 들어왔으나 배척을 받았다. 그러다가 명 사신과의 접촉을 통한 문물교류, 등 정치적 격동을 겪으면서 선조 때 남언경(南彦經), 이요(李瑤) 등이 양명학을 받아들였고 , 등도 부분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척론에 밀려 위축되었으며 본격적인 양명학의 수용은 장유(張維), (崔鳴吉) 등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이후 등에 의해 학파()가 형성됨으로써 양명학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졌다. 양명학은 자, 특히 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한말·일제통치기에는 김택영(金澤榮), (朴殷植), (鄭寅普) 등에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