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네켄과 한인 이주, 메리다 한인회

에네켄과 한인 이주, 메리다 한인회

가. 에네켄 산업, 초록의 금

19세기 중엽 이래 국제 무역량의 증가로 선박용 로프(rope)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선박용 로프는 멕시코에서 주로 재배되던 에네켄(henequén)이 원료이므로 그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다. 멕시코 만에 연한 유카탄 지역은 해로를 이용하여 유럽 및 미국과의 접근성이 좋은 데다, 멕시코 대부분의 지역에 비해 고도가 낮고 평탄하여 대규모로 에네켄을 재배하고 항구까지 수송하기에 유리하였다.

특히 메리다를 중심으로 하는 유카탄의 지도층은 북아메리카 및 유럽의 국가와 직접 교역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에네켄 산업을 육성시켰으며, 에네켄 재배는 메리다를 비롯한 유카탄 지역에 많은 부를 안겨 주었다. 당시 에네켄은 ‘초록색 금’이라는 의미의 ‘오로 베르데(oro verde)’라고 불렸으며, 에네켄 산업의 전성기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초록 금의 시대(los años del oro verde)’라고 불렸다. 그러나 19세기 중엽부터 에네켄 농장에서 혹사당하고 착취당한 원주민들의 반란이 시작되어 20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 1847년 폭동 이후 1만여 명의 원주민이 벨리즈(Belize)로 이주하였고, 1848년에는 폭동을 일으킨 원주민들을 쿠바(Cuba)로 강제 이주시켰다.

사회적 불안정으로 말미암아 유카탄 지역의 인구는 19세기 중엽에 42만여 명에서 20세기 초에는 30여 만 명으로 감소하였으며, 활황을 맞은 에네켄 농장은 노동력 부족 현상을 빚었다. 이에 멕시코 정부가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유입을 추진하여, 중국인 노동력이 가장 먼저 들어오게 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 동남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라틴 아메리카 등으로 이주한 중국인 저숙련 노동자, 즉 쿨리(Coolie)의 규모는 100년간 약 1,25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멕시코에 유입된 쿨리들은 주로 멕시코 북부 지역의 개간지와 유카탄 지역의 에네켄 농장으로 이주하였는데, 1875년에 시작되어 1890년에는 본격적으로 이주하였다. 정확한 규모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수천 명에서 2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중국인 쿨리들이 에네켄 농장으로 이주하였으며, 이들은 대부분 농장에 빚으로 매인 부채 노동자들이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 노동자들은 개척 이민자들로, 1888년 정부 간 이민 계약에 따라 이주하였으며, 그 규모가 역시 정확하지는 않으나 수천 명에서 수만 명으로 추정된다. 중국인 노동자와 일본인 개척 이민자의 이주 과정에서 멕시코 정부, 중국 정부, 일본 정부 간의 계약 혹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이루어졌다.

나. 한인의 이주

1904년 유카탄 농장주협회 대리인인 존 마이어스(John G. Myers)가 한국에서 멕시코 이민을 모집하였다. 앞서 일본과 중국에서의 노동자 모집에 실패한 마이어스는 부유한 국가인 멕시코로의 이주를 권하는 신문 광고를 통하여 전국에서 1,033명을 모집하였다. 1902년에 이루어진 하와이 이민이 독신 남성으로 구성된 데 비해 멕시코 이민은 가족 이민의 형태로, 196명의 독신자와 257가족으로 구성되었다. 1,033명 중 남자가 702명, 여자가 135명, 아동이 196명이었다. 1905년 4월 4일 제물포항을 출발한 이민단은 멕시코의 살리나크루스(Salina Cruz) 항과 프로그레스(Progres) 항을 거쳐 5월 14일 메리다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이민단은 인근의 에네켄 농장으로 흩어졌다.

1902~1905년 한국인의 첫 해외 이주인 하와이 이주의 경우, 주한 공사의 주재로 고종의 허가를 받고 적법하게 진행되었으나, 멕시코 이주는 그렇지 못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 당국은 이주민들이 제물포항을 떠난 직후 한인들의 멕시코 이주가 절차상으로 불법이었고, 이주민은 정상적인 이민이 아니라 에네켄 농장에 강제 노동자로 속아서 갔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이에 조선인들의 외국 이민을 금지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다. 메리다 한인회

1909년 4년간의 계약 기간이 종료되자 유카탄의 농장에 흩어져 있던 한인들 중 다수가 메리다로 몰려들었다. 당시 메리다로 이주한 한인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연락하여 자신들의 구제와 생활 지도를 요청하고 메리다 한인회를 구성하였다.

메리다 한인회는 유카탄 지역 한인들의 모임일 뿐 아니라,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의 메리다 지부로서 역할을 하였다. 메리다 한인회는 설립 이후 다양한 활동을 통해 유카탄 지역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국권피탈 이후에는 독립 자금을 모아서 송금하고, 독립군 양성 학교인 숭무학교(崇武學校)를 세워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메리다 한인회는 1910년 국권피탈이 이루어진 지 3개월 만에 메리다에서 일본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1918년에는 멕시코를 순방하던 안창호(安昌浩)가 메리다 한인회를 방문하여 한인회 창설 10주년 기념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1909년 『황성신문(皇城新聞)』 기사에 따르면, 숭무학교에서 훈련하던 이들은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1913년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숭무학교의 이근영(李根永)을 비롯한 한인 300명이 과테말라 혁명에 참전하였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메리다의 한인 30명을 비롯한 40여 명의 한인 병사가 과테말라 혁명에 참전하였다.

멕시코 혁명 당시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전투로 말미암아 한인들이 참전하거나 흩어지고, 1921년에 다수의 한인들이 쿠바로 이주하면서 한인회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메리다의 한인들이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멕시코시티(Mexico City) 및 북부 국경 도시 티후아나(Tijuana)로 대거 이주하면서 한인회는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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