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루이스포토시의 역사

산루이스포토시의 역사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 이전에 산루이스포토시 일대에는 치치메카 족(Chichimeca)이 거주하고 있었다. 치치메카 족은 멕시코 북부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으로, 용맹하고 전쟁을 자주 치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멕시코시티(Mexico City)를 비롯한 멕시코 중부 지방은 에스파냐의 식민 지배가 시작된 이후 부왕령(副王領)이 설치되고 본격적인 식민 지배가 이루어졌으나, 멕시코의 중부 이북은 여전히 원주민이 지배하고 있었다. 치치메카 족은 기독교로 개종하기를 거부하며 에스파냐 인들과 마찰을 빚었고,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선교 중심지를 공격하였다. 또한 당시 멕시코에서 가장 중요한 은광인 사카테카스(Zacatecas) 은광에서 멕시코시티로 이르는 길의 여행자들을 자주 공격하였다. 이러한 대치 상황은 1589년에 미겔 칼데라(Miguel Caldera)와 디에고 데 라 마그달레나(Diego de la Magdalena) 신부의 중재로 종결되었다.

식민 시기 멕시코의 광업(1519~1549년)

식민 시기 멕시코의 광업(1519~1549년) ⓒ 푸른길

1583년 산루이스포토시 지역에는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선교 중심지가 설치되었다. 1592년에 산루이스포토시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산페드로(San Pedro) 봉에서 은광이 발견되었으나 광물 채굴에 필요한 용수(用水)가 부족하였다. 산루이스포토시가 위치한 곳은 계곡으로 용수가 풍부하여 광산 종사자들의 거주지로서 적절하였다. 1592년 미겔 칼데라가 이 계곡에 산루이스미나스델포토시(San Luis Minas del Potosí)를 건설하였으며, 이곳이 이후에 산루이스포토시가 되었다. 도시가 건설된 이후로 식민 기간 동안 광업, 농업, 목축업, 상업, 문화, 종교, 행정 및 정치 면에서 주요 중심지였다. 산루이스포토시는 19세기와 20세기에 멕시코의 정치, 군사, 사상의 주요 무대였다. 1862년에 프랑스군이 멕시코를 침공하여 푸에블라(Puebla)와 멕시코시티를 점령하였으며, 멕시코의 25개 주 가운데 18개 주를 점령하였다. 이에 1863년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 대통령은 산루이스포토시를 멕시코의 임시 수도로 지정하고, 게릴라 작전을 통해 프랑스군에 맞섰다.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 대통령의 집권 시기(1876~1880, 1884~1911)에 산루이스포토시는 디아스 대통령의 집권을 공개적으로 반대하였으며, 카밀로 아리아가(Camilo Arriaga), 리카르도 플로레스 마곤(Ricardo Flores Magón), 안토니오 디아스 소토이가마(Antonio Díaz Soto y Gama) 등 당시 진보적인 인사들이 도시로 모여들었다.

멕시코 혁명(1910~1917) 당시 주창자인 프란시스코 인달레시오 마데로(Francisco Indalècio Madero)가 1910년 11월 20일에 ‘산루이스포토시 강령’을 공포함으로써 멕시코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위치상 전략적 요충지였던 산루이스포토시는 혁명 전쟁에서 여러 세력 간의 전장이 되었으며,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20세기 멕시코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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