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풀코 갈레온

아카풀코 갈레온

아카풀코 갈레온(Galeón de Acapulco)은 마닐라 갈레온(Galeón de Manila) 또는 중국선(Nao de China)이라고도 하는 대형 범선이다. 1565년부터 1815년까지 필리핀과 아카풀코 사이의 무역을 담당했던 무역선으로, 당시로서는 귀한 아시아 물품을 에스파냐 식민지로 수송하던 선박들이다. 마닐라-아카풀코 항로는 1519년에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태평양을 횡단한 이후 에스파냐가 향료를 구하기 위해 원정대를 지속적으로 파견하면서 형성되었다. 1564년에 에스파냐 사람인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Andrés de Urdaneta)가 필리핀에서 아메리카로 돌아오는 항로를 발견한 이후, 에스파냐는 필리핀과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 간에 정기적인 교역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아카풀코는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잇는 항구가 되었다.

갈레온 무역 루트라고 불리는 이 항로는 아프리카를 통해 아시아로 가는 포르투갈의 항로보다 안전하고 빨랐다. 태평양 인도 무역로(Carrera de Indias en el Pacificos) 또는 서쪽 섬들의 무역로(Carrera de Islas de Poniente: 에스파냐 인들은 필리핀을 ‘서쪽 섬들’이라고 불렀음)라고도 불린 이 무역로는 멕시코 만과 카리브 해를 대상으로 한 인도 무역로(Carrera de Indias)보다는 규모도 작았지만 막대한 이익이 보장된 무역이었으며, 에스파냐 식민지인(누에바에스파냐 인)들이 주로 담당하였다.

당시 에스파냐는 필리핀을 통하여 중국과의 교류를 원하였다. 따라서 1565년 세부(Cebu)의 레가스피(Legaspi)에 무역 근거지를 설치하였다가 1571년에 마닐라로 옮겼다. 그 이유는 마닐라가 중국과의 무역에 유리한 입지였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오랜 교역을 바탕으로 중국인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중국은 명나라 무종(武宗)이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민간 무역을 장려하면서 중국과 이 지역 간의 무역량이 증가하였으며, 16세기 말에는 대부분의 중국 무역선들이 필리핀과 보르네오(Borneo) 섬에서 외국과 교역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아카풀코에서 출발한 갈레온은 누에바에스파냐의 은, 코치닐(cochineal) 염료, 씨앗, 고구마, 담배, 완두콩, 초콜릿, 카카오, 수박, 포도나무, 무화과나무 등의 1차 산업 상품과 가죽 가방을 실었고, 에스파냐에서 수송해 온 포도주, 올리브유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온 검(劍)류의 무기와 마구(馬具)를 실었다. 마닐라에 도착한 갈레온들은 중국 상인들로부터 비단과 도자기를 구입하였으며, 향신료, 야자 와인 등의 식료품과 보석인 호박을 비롯하여 마닐라삼, 비단실, 철, 염료, 주석, 왁스, 화약 등과 면직물, 보석, 문방구류, 자개류, 장신구를 비롯한 사치품들도 구입하였다. 이들이 구입한 상품은 중국뿐 아니라 페르시아, 인도, 일본 및 동남아시아에서도 온 것이었다. 당시 에스파냐가 구입한 상품은 국내 및 식민지 내의 상품과 경쟁하지 않는 것들로, 무역으로부터 자국 상품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아카풀코에서 마닐라로 가장 많이 수송된 상품은 은이었으며, 갈레온에서 내놓은 은화는 당시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사용되었다.

갈레온들이 태평양을 건너는 데는 최소한 4개월 정도가 걸렸으며, 카리브 해 지역의 선단과 마찬가지로 해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에스파냐 해군의 호위를 받았다. 마닐라에 도착한 갈레온은 화물을 하역한 후 바로 아시아의 상품을 싣고 아카풀코로 향하였는데, 무역풍을 피해 구로시오 해류(Kuroshio current)를 타고 북쪽을 향하는 항로였다. 따라서 회항을 할 때 갈레온들은 일본 해적, 즉 왜구의 공격을 자주 받았다. 태평양을 건넌 갈레온들은 산디에고 요새(Fuerte de San Diego)나 산블라스 요새(Fuerte de San Blas)에 도착한 후 다시 아카풀코로 돌아와 상품을 하역하였다. 하역된 상품들은 멕시코시티로 향하여 베라크루스를 거쳐 에스파냐의 세비야(Sevilla) 또는 카디스(Cadiz)로 가거나 페루 부왕령(副王領)으로 수송되었다.

1593년 ‘허가 칙령’을 통해 에스파냐 식민지에서는 오직 아카풀코에만 아시아와의 무역이 허용되었다. 이 칙령을 통해 아카풀코 갈레온들의 규모는 300톤 이하로 연간 두 척, 적재 화물의 가치는 마닐라로 향할 때는 25만 페소, 돌아올 때는 50만 페소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이내 지켜지지 않았으며, 18세기 말에 배의 규모는 2천 톤에 이르고 적재 화물의 가치도 200만 페소에 이르렀다고 한다. 갈레온 무역은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이 중국과의 무역을 확대하고, 1778년 무역 자유화로 인해 동인도회사의 상품들이 베라크루스 항에 하역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국의 경제가 위기를 겪고 은의 교환 가치가 하락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1811년에 마닐라에서 아카풀코로 떠난 ‘마젤란호’가 1815년에 마닐라로 귀향하면서 에스파냐 국왕인 페르디난도 7세(Ferdinando Ⅶ)는 아카풀코 갈레온 무역의 폐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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