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라의 역사

푸에블라의 역사

푸에블라와 틀락스칼라(Tlaxcala)는 푸에블라-틀락스칼라 분지에 입지하여 연담(聯擔) 시가지를 이룬다. 1519년에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는 베라크루스(Veracruz)로부터 틀락스칼라를 거쳐 멕시코시티에 도착하였는데, 저지대의 온난한 기후대를 지나 푸에블라-틀락스칼라 분지에 이르러 처음으로 눈을 보았다고 한다. 푸에블라는 식민 시기 이전까지 인구 밀도가 높지 않았던 데 비해, 틀락스칼라에는 나우아틀(Nahuatl) 어와 오토미(Otomi) 어를 사용하는 부족들이 살았으며, 푸에블라-틀락스칼라 분지의 인구는 코르테스가 지날 당시 5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지역은 지형적으로 교통의 요충지로서 상업이 발달하였고, 틀락스칼라의 도시와 마을은 성벽으로 둘러싸였으며, 종교와 행정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였다.

아스테카(Aztec) 왕국에 조공을 바치던 틀락스칼라는 처음에는 에스파냐 인들에게 저항하였으나 이내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지역에 비해 독립적인 지위와 기존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았고, 이는 1545년 에스파냐 왕령에 의해 제도화되었다. 틀락스칼라 인들은 에스파냐 인들이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북쪽 지역을 탐험할 때 동행하여 변경의 요새에 배치되었으며, 오늘날 미국의 텍사스와 플로리다 지역까지 이르렀다.

원래 이름인 푸에블라데로스앙헬레스(Puebla de los Angeles)는 1531년에 세워졌으며, 이는 에스파냐 정복의 역사에 매우 주요한 순간이었다. 에스파냐 인들의 식민지 정복 초기는 누에바에스파냐(Nueva España) 지역에 대한 조사, 1524년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도래, 코르테스와 반(反)코르테스파 간의 긴장 등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이 때문에 새로이 도착한 에스파냐 인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원주민에 비해 소수였던 에스파냐 인들은 원주민의 반란이나 식민지의 정치적 불안정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이를 적절히 방어하고 대처할 수 있는 중심지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푸에블라는 누에바에스파냐 지역의 경제적 중심지이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전략적 근거지로 세워졌다. 당시 푸에블라는 멕시코 중부 교통로의 요지였으며, 특히 동서 교통로의 주요 지점이었다. 1530년 당시 틀락스칼라의 주교인 훌리안 가르세스(Julián Garcés)가 에스파냐 국왕에게 멕시코시티와 베라크루스 항 사이에 에스파냐 인의 도시를 건설할 필요성이 있다고 역설하였고, 국왕은 푸에블라에 천사의 도시라는 뜻의 ‘시우다드데로스앙헬레스(Ciudad de los Angeles)’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푸에블라-틀락스칼라 분지는 쿠에틀락스코판(Cuetlaxcopan) 계곡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나우아틀 어로 ‘뱀이 허물을 벗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푸에블라는 1538년에 에스파냐 왕으로부터 문장을 하사받았고, 1558년 ‘기품 있고 충성스러운 도시(Noble y Leal)’라는 칭호를 받는 등 이후에도 각종 칭호를 얻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 푸른길

푸에블라는 1530년대 초에 전형적인 에스파냐의 도시 건설 양식으로 세워졌다. 도시 중심에 광장(Zocalo)을 두고 주변으로 교회, 공공 기관, 지배층의 거주지가 건설되었다. 가로망은 광장을 기준으로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되었다. 쾌적한 기후와 전략적 위치 때문에 푸에블라는 건설 직후 번영을 이루며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서 멕시코시티 다음가는 중요한 도시로 부상하였다. 에스파냐 식민 시기에 도시는 배후의 농촌 지역을 관할하였는데, 18세기 말 푸에블라의 관할 구역은 현재의 베라크루스 주에서 게레로(Guerrero) 주에 이르는 광대한 것이었다. 멕시코 독립 전쟁 당시 푸에블라는 혁명 정신에 관한 인쇄물의 발간과 배포의 역할을 맡았다.

에스파냐의 식민지 도시 계획

에스파냐의 식민지 도시 계획 ⓒ 푸른길

푸에블라는 베라크루스에서 멕시코시티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지로, 19세기에 멕시코가 외국과의 전쟁을 겪을 때에는 멕시코시티로 진격하는 외국 부대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미국과 멕시코 전쟁(1846~1848년) 기간 중 1847년에는 멕시코시티로 향하던 미국 군대에 약 한 달간 점령당하였다.

1862년 5월 5일 멕시코군은 베라크루스를 통해 멕시코시티로 진격하는 프랑스군과 푸에블라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그나시오 사라고사(Ignacio Zaragoza) 장군이 이끌던 멕시코군은 당시 세계 최강인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를 기념하여 당시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 대통령은 푸에블라의 이름을 ‘푸에블라데사라고사(Puebla de Zaragoza)’로 바꾸었다. 또한 그날의 승리를 기리며 5월 5일을 휴일로 지정하여 오늘날까지 기념하고 있는데, 푸에블라에서 가장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린다. 1863년 프랑스군은 푸에블라를 재차 공격하여, 1866년에 프랑스군이 멕시코에서 철수할 때까지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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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멕시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