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시티의 교육과 문화

멕시코시티의 교육과 문화

가.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멕시코 최초의 대학은 1551년 건립된 멕시코 왕립․교황부속대학교(Real y Pontificia Universidad de México)로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Universidad Nacional Autónoma de México)의 전신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국립대학이 건립된 것은 1881년이며, 1910년 멕시코 국립대학 관련법이 선포되면서 제도화되었다. 이후 1933년, 1945년의 조직법 개정을 통해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는 공공 법인체로서, 국가의 분권 조직으로서 법적 권한을 부여받았다. 재정 및 운영에서 국가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는 국립자치대학교이다.

라틴 아메리카 최대의 대학으로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의 재학생 수는 10만 명이 넘으며, 멕시코 대통령과 고위 공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하였다. 멕시코 정치 운동의 중심지로서, 1968년 틀라텔롤코(Tlatelolco) 사건으로 이어진 학생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사립 학교에 비하여 저렴한 학비와 양호한 연구 환경, 높은 취업률로 라틴 아메리카 각국의 학생들이 선호하는 대학이다.

멕시코시티의 남서부의 거대한 화산암 위에 자리 잡은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의 캠퍼스는 ‘대학 도시(Ciudad Universitaria, CU)’라고도 한다. 1950년대 미겔 알레만(Miguel Alemán) 대통령의 재임 기간 중 넓이가 도심에 흩어져 있던 대학 기관들이 이곳으로 모였다.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를 비롯하여 콜레히오데멕시코(Colegio de México, ColMex) 등 멕시코의 주요 대학들이 대학 도시 주변으로 입지하고 있으며, 대학 도시와 멕시코시티의 중심지를 잇는 도로(Avenida Universidad)에는 많은 연구 기관과 출판사가 있어 멕시코의 주요 연구 및 출판 지역을 이루고 있다.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é Clemente Orozco) 등 멕시코 벽화 운동의 주요 작가들이 참여하여 완성된 작품들이 대학의 본관, 중앙도서관, 이과대학, 올림픽 경기장 등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이곳의 올림픽 경기장은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이 열렸던 멕시코 국립자치대학 올림픽 경기장(Estadio Olímpico Universitario)이다. 대학 도시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나. 아스테카 경기장(Estadio Azteca)

멕시코시티의 교외 지구인 산타우르술라(Santa Úrsula)에 있는 축구 전용 구장인 아스테카 경기장(Estadio Azteca)은 멕시코 국가 대표 축구팀의 홈구장이자 멕시코시티에 연고지를 둔 클럽 아메리카(Club América)의 홈구장이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인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 전에서 마라도나(Diego Maradona)가 ‘신의 손’이라 불린 골을 기록한 곳으로 유명하다. 세계 5대 경기장으로 꼽히며, 10만 5천여 명의 관중을 수용하여 세계 최대의 축구 전용 구장으로 꼽히기도 한다. 1970년에는 이탈리아와 서독 팀 4강전의 연장전에서 30분 동안 다섯 골을 터뜨리며 역전에 재역전을 거듭한 끝에 이탈리아가 승리한 세기의 승부 또한 이 경기장에서 이루어졌다.

아스테카 경기장은 해발 고도 2,680m에 위치하여 원정 팀에게는 매우 불리한 경기장으로 이름이 높다. 멕시코 국가 대표 축구팀은 2012년 8월 미국과의 경기에서 1:0으로 패하기 전까지 23경기 23승을 기록하였는데, 이날의 패배가 1961년 이 경기장이 개장한 이래 멕시코 축구 대표 팀이 기록한 아홉 번째 패배였다고 한다.

다. 멕시코 벽화 운동

멕시코 벽화 운동(Muralismo)은 1920년대 멕시코 정부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일어난 독특한 미술 운동이다. 1910~1917년 멕시코 혁명 이후 수립된 혁명 정부는 외세를 배격하며 멕시코의 전통을 찾고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방법으로 사실주의 양식의 벽화를 택하였다. 당시 멕시코의 문맹률이 높아, 혁명의 의미와 목적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데 글보다는 그림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당시 교육부 장관이었던 바스콘셀로스(Jose Vasconcelos)는 전국적으로 학교 건설을 추진하였으며, 학교를 비롯한 모든 공공건물의 벽면을 ‘화가 및 조각가 조합(원어)’에 맡겨 벽화를 그리도록 하였다.

멕시코 벽화 운동의 화가들은 당시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뿐 아니라, 식민지 시대 에스파냐 바로크의 영향과 아스테카 및 마야 문명의 영향까지도 벽화에 투영시켰다. 근대 미술사의 소외 지역이었던 라틴 아메리카의 미술은 멕시코 벽화를 통하여 처음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멕시코의 벽화 운동은 1930년대 경제 공황 및 노조 운동과의 이념 갈등으로 어려움을 겪던 미국 화단에도 영향을 끼쳤다.

1930년대에 화가들의 활발한 활동이 이루어졌으며, 1940년대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했던 멕시코 정부의 중립 내지 우파 정책으로 마무리되었다. 벽화 운동의 대표적인 화가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David Alfaro Siqueiros),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é Clemente Orozco) 등이다. 주요 작품들이 멕시코시티의 멕시코 국립자치대학교, 올림픽 주경기장 등 다수 공공건물에 그려졌으며, 과달라하라를 비롯한 멕시코의 여러 도시와 미국의 디트로이트, 시카고, 뉴욕 등에도 그려졌다. 멕시코시티의 알라메다 공원(Alameda Central)의 디에고 리베라 벽화 박물관(Museo Mural Diego Rivera)에는 “알라메다 공원의 일요일 오후의 꿈(Sueño de una tarde dominical en la Alameda Central, 1947)”을 비롯한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이 여럿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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