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페의 역사

산타페의 역사

산타페는 1573년에 후안 데 가라이(Juan de Garay)에 의해 건설되었다. 가라이는 폐허로 내버려진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재건한 인물로, 라플라타(La Plata) 식민지 영역의 확장을 꾀하던 에스파냐 원정대의 지도자였다. 이때 그가 세운 산타페의 위치는 오늘날 산타페에서 북쪽으로 85㎞ 정도 떨어져 있으며, 현재의 카야스타(Cayastá) 시에 해당한다. 이곳은 파라나 강의 지류인 산하비에르(San Javier) 강의 지속적인 범람으로 인한 피해가 잦았기 때문에, 치수 기술이 부족했던 당시로서는 도시로서의 입지에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산타페는 결국 1651∼1653년에 걸쳐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1660년 무렵에는 파라나 강에 무역항이 들어섰으며, 이를 계기로 산타페는 남아메리카 농축산물의 운송과 유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내륙 항구도시로 발전해 갔다.

팜파스의 철도망 확장 과정(1870~1900년)

팜파스의 철도망 확장 과정(1870~1900년) ⓒ 푸른길

아르헨티나 독립 운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인 1813년에는 인접한 산로렌소(San Lorenzo)에서 남아메리카 독립의 영웅인 호세 데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 장군이 지휘하는 라플라타 독립군과 에스파냐 식민지군 사이에 전투(산로렌소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양측 모두 2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한 소규모 전투였지만, 산 마르틴 장군이 아르헨티나 영토에서 벌인 유일한 전투이자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는 상징성 때문에 오늘날 아르헨티나에서는 높이 평가되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후 1814년에는 산타페 주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에서 분리되면서 주도가 되었다.

1852년에는 아르헨티나 각 지역의 대표들이 산타페에 모여 제헌 회의를 개최하였고, 이듬해 5월 1일에는 산타페 시 의회에서 남아메리카 최초의 헌법이기도 한 아르헨티나 헌법이 공표되었다. 이로써 산타페는 ‘헌법의 요람(Cuna de la Constitución)’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도시의 정식 명칭은 에스파냐 어로 ‘진실한 십자가에 대한 신성한 믿음’이라는 뜻의 ‘산타페데라베라크루스(Santa Fe de la Vera Cruz)’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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