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르도바의 사회

코르도바의 사회

가. 아르헨티나 제2의 도시

코르도바는 식민지 건설 초기부터 번영하였으며, 오늘날에도 규모나 위상에 있어 부에노스아이레스 다음 가는 아르헨티나 제2의 도시이다. 인구 규모만 보더라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이어 2위에 해당한다. 자동차, 항공, 정보 통신 등의 산업과 기술 분야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중심지이자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코르도바는 교육 도시로서의 명성도 높다. 대표적으로 코르도바 국립대학교(Universidad Nacional de Córdoba)를 들 수 있다. 1613년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아르헨티나 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남아메리카에서는 네 번째로 오래된 역사를 자랑한다. 유네스코 지정 문화유산인 ‘코르도바의 예수회 수사 유적과 대목장’에 포함되어 있다. 이 대학교는 1918년 남아메리카 전역의 고등 교육 민주화와 보급에 크게 기여한 교육 개혁 운동의 진원지였으며, 1969~1970년에 걸쳐 일어난 코르도바 봉기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코르도바 국립대학교에는 중등학교인 몬세라트 학교(Colegio Nacional de Monserrat)도 소속되어 있는데, 1687년 세워진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오래된 중등학교로서 중학교 및 고등학교 과정이 설치되어 있다. 이 밖에도 코르도바 시내에는 6~7개의 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교육 기관들이 소재하여, 교육 도시로서의 명성을 이어 나가고 있다.

나.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의 도시

코르도바는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난 지역이다. 1918년 코르도바 국립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학 교육의 민주화와 자율화를 요구하는 동맹 휴학이 일어났다. 대학 개혁이라는 뜻의 ‘레포르마 우니베르시다드(Reforma Universidad)’라고 불리는 이 운동은 아르헨티나는 물론 남아메리카 각지로 퍼져 나갔다. 대학의 자율성이 증진되고, 여성이나 유색 인종들에게도 대학의 문호가 넓어지고,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대학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하는 등 남아메리카 고등 교육의 민주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969~1970년에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5월 혁명(68혁명이라고도 함)’의 영향을 받아 학생과 노동자 중심의 대규모 봉기가 발생하여 인접 지역들로 퍼져 나갔다. 이는 군사 정권이 일시 힘을 잃는 사이 축출당한 후안 페론 대통령(Juan Domingo Perón, 1895~1974)이 1973년 재집권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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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르헨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