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루프레투의 역사

오루프레투의 역사

가. 도시의 성립

오루프레투(Ouro Prêto) 지역은 원래 거주하던 남아메리카 원주민 중 투피 족(Tupi)의 영역으로 추정된다. 유럽인들 가운데 오루프레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포르투갈 식민 시기였던 1693년부터 1698년 사이에 현재의 미나스제라이스(Minas Gerais) 주 중부와 남부 지역을 탐험하는 과정에서 오루프레투 인근인 트리푸이(Tripuí) 계곡에서 금이 함유된 산화철 조각을 발견한 것이 도시 성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금이 발견되자 곧이어 이곳으로 금을 채취하려고 몰려드는 골드러시(gold rush)가 일어났고, 빌라히카(Vila Rica)라는 이름의 광산 취락으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나. 도시의 발전과 브라질 독립운동의 현장

18세기에 금광을 바탕으로 축적된 도시의 부를 통해 오루프레투는 많은 인구와 유럽의 지식인들을 끌어들였고, 철학과 예술이 번성하였다.

이 시기 유럽의 바로크 및 로코코 양식과 브라질의 지역성이 융합된 광산 바로크(Barroco Mineiro) 양식의 성당, 주택, 공공시설 등이 도시 곳곳에 세워졌다. 특히 ‘브라질의 미켈란젤로’로 일컬어지는 조각가 안토니우 프란시스쿠 리스보아(António Francisco Lisbôa)의 고향이 이곳인 연유로 그가 만든 여러 성당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1720년에 포르투갈의 미나스제라이스 식민 행정구(capitania)의 중심지가 되었고, 1750년대에는 인구가 약 10만 명에 이르는 브라질 최대 도시로 성장하였다. 도시의 번영을 가져다준 것이 금이었지만, 한편으로 식민지 브라질을 지배하고 있던 포르투갈 국왕에게는 약탈의 대상이 되기도 하여 광산과 광물에 과도한 세금이 부과되었다. 이러한 국왕의 조치는 오루프레투 주민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1789년에 브라질에서의 독립과 공화 정부 수립 운동(Inconfidência Mineira)이 이곳에서 처음으로 발발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은 포르투갈 군대에 진압되고, 이 운동을 주도했던 티라덴치스(Tiradentes)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조아킹 조제 다 시우바 샤비에르(Joaquim José da Silva Xavier)가 교수형에 처해지는 아픈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 푸른길

다. 도시의 쇠퇴와 브라질 최초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

19세기 중엽부터 오루프레투의 번영을 이끌던 금광이 점차 고갈되자 도시는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브라질 독립 이후 1897년에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주도라는 지위도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북쪽의 새로운 계획도시인 벨루오리존치(Belo Horizonte)에 넘겨주면서 도시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그럼에도 금광을 바탕으로 부유했던 과거의 유산과 흔적은 오루프레투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1933년 도시 전체가 브라질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주변 지역과 함께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번영했던 시기의 경관들이 보존 및 복원되었다.

1980년에는 브라질에서 최초로 오루프레투 역사도시(Cidade Histórica de Ouro Preto)가 유네스코(UNESCO)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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