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이아바의 역사

쿠이아바의 역사

쿠이아바라는 도시 이름은 ‘화살 낚시’라는 뜻의 남아메리카 인디언 말에서 유래했다고 하고, 유쿠이아파(Ykuiapá)라는 인디언 부족 이름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18세기 초 쿠이아바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상파울루 식민 행정구(Capitania de Saõ Paulo)를 맡고 있던 호드리구 세자르 데메네제스(Rodrigo César de Menezes) 지사는 1727년 쿠이아바 시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과 20년 후인 1746년에 지진으로 마을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이후 재건된 마을 쿠이아바는 1818년에 읍으로 승격하였고, 1835년에는 마투그로수 주의 주도가 되었다.

18세기 말부터 파라과이 전쟁(Guerra do Paraguay: 브라질·아르헨티나·우루과이 연합군과 파라과이와의 전쟁으로 삼국동맹 전쟁이라고도 부름)이 발발한 19세기 중엽(1864~1870년)까지, 쿠이아바는 작은 마을에 불과했고 쇠퇴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일어나자 쿠이아바는 브라질 군대에 설탕과 식량 등 군수품을 공급하게 되었고, 이로써 사회 기반 시설이 건설되면서 잠시 동안 경제적 부흥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종전 후 쿠이아바는 다시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졌으며, 브라질 왕정 정부나 공화정 정부에 미움 받은 정치인들의 피난처로 활용되곤 했다. 이와 같이 쿠이아바는 국내 다른 지역과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20세기에도 전통 생활 양식들을 잘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남아메리카의 국가 간 분쟁

남아메리카의 국가 간 분쟁 ⓒ 푸른길

1930년부터 외부로 연결되는 도로가 놓여 고립을 면하게 되었고, 이어서 공항도 건설되었다. 쿠이아바는 시로 승격되었고, 브라질리아에 새로운 수도가 건설된 1960년 이래 빠르게 성장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농업이 상업화되어 콩, 쌀 등 지역 농산물을 해외로 수출하게 되면서 도시의 성장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1960년에 인구 5만 명이었던 이 소도시는 20년 뒤에는 인구가 25만여 명이나 되는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과거에 쿠이아바는 금광업의 중심지로서 출발하여 외지인을 끌어들였지만, 지금은 고무와 야자열매 채취로 노동자들을 불러모으고 있으며, 특히 서남아시아의 이민이 급증하였다.

연관목차

145/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