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린다의 역사

올린다의 역사

가. 도시의 건설

올린다의 원주민은 남아메리카 원주민 중 카에테 족(Caetés)과 투피남바 족(Tupinambás)으로 추정되는데, 두 부족은 서로 경쟁적인 관계로 각각 구릉성 산지에 정착하였다. 지리상의 발견 이후 올린다에 처음 도착한 유럽 인은 프랑스 용병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1535년에 실제로 도시를 건설한 사람은 포르투갈의 두아르치 코엘류 페레이라(Duarte Coelho Pereira)였다.

이 무렵 포르투갈은 효율적인 브라질 식민 지배를 위해 15개 식민 행정구(capitania) 체제로 분할하였는데, 페레이라가 포르투갈 국왕에게서 페르남부쿠(Pernambuco) 식민 관할구의 지배권을 부여받고, 그 중심지로 올린다를 본격적으로 건설하였다.

당시 올린다는 남쪽에 있는 베베리비(Beberibe) 강과 카피바리비(Capibaribe) 강 유역의 충적지에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농장들이 개척되고, 천혜의 항구라는 자연적 조건과 결합되어 브라질 식민 지배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다.

도시 중앙에 성당 등 종교 건축물을 건설하고 도로를 정비하는 도시 계획도 이루어졌다. 특히 16세기 후반부터 가톨릭교의 카르멜회, 예수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베네딕트회 등이 올린다에 신부와 선교사를 파견하여 여러 성당을 건설하였고, 올린다는 자연스럽게 가톨릭교의 남아메리카 선교 중심지로 자리 잡게 되었다. 1614년에는 페르남부쿠 성직 자치구가 이 도시에 자리를 잡았고, 1676년에 올린다 교구가 되었다.

나. 네덜란드의 점령과 회복

17세기에 포르투갈 왕국은 에스파냐와 일시적으로 통합되었다. 포르투갈이 약화된 이 시기를 틈타 네덜란드가 올린다와 헤시피(Recife) 인근 지역을 장악하였고, 이를 통해 포르투갈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접근할 수 있었다. 1630년 올린다를 점령한 네덜란드는 1631년에 도시를 불태우고 파괴하였으며, 그 대신에 해안을 따라 네덜란드 정착지를 건설하였다. 이 무렵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요한 마우리츠(Jahan Maurits)를 네덜란드 점령지의 통치자로 임명하였는데, 그는 페르남부쿠의 항구이자 네덜란드의 주요 근거지였던 헤시피에 도착하였다. 마우리츠는 여러 차례의 탐험을 통해 네덜란드 점령지를 남으로는 세르지피(Sergipe)까지, 북으로는 마라냥 상루이스(São Luís do Maranhão)까지 서서히 확장하였다.

1640년 이베리아 연합(Iberian Union)이 와해된 후 포르투갈은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하였고, 1654년에 올린다의 지배권을 되찾았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 푸른길

다. 도시의 침체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올린다는 페르남부쿠에서 유럽 인들의 첫 정착지였고, 행정적으로는 페르남부쿠 식민 행정구의 수도였지만, 경제적으로는 남쪽의 헤시피가 갈수록 번성하는 데에 비해 점차 쇠퇴하였다. 18세기 들어 사탕수수 산업이 쇠퇴하면서 1827년 헤시피가 올린다를 대신하여 새로운 주도로 정해지자, 도시의 영광은 과거의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올린다가 가지고 있는 식민지 시대 도시의 구조, 경관, 건축물 등의 역사·문화적 가치는 1982년 브라질의 두 번째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등재로 이어졌다. 또한 2006년에는 브라질 문화관광부와 유네스코가 지원하는 문화 수도 프로젝트에서 첫 번째 도시로 올린다가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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