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

가. 도시의 건립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역사는 1536년 2월에 에스파냐의 페드로 데 멘도사(Pedro de Mendosa, 1487~1537)가 13척의 선박과 2,000여 명의 인원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라플라타 강 하구에 도착하여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오늘날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남부에 정착한 그들은 이 도시에 ‘바람이 좋은 성모 마리아의 도시(Ciudad de Nuestra Señora Santa María del Buen Ayre)’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이 도시는 식량 부족, 원주민의 저항 등에 직면하여, 5년 뒤인 1541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약 40년이 지난 1580년에 후안 데 가라이(Juan de Garay, 1528?~1583년)가 도시를 재건하면서 본격적인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가라이는 산티시마트리니다드(Santísima Trinidad, ‘삼위일체’)라는 요새와 푸에르토데산타마리아데로스부에노스아이레스 항구(Puerto de Santa María de los Buenos Aires, ‘순풍이 부는 성모 마리아 항’)를 건설하고, 이 두 이름을 합쳐 도시의 이름을 ‘삼위일체의 도시와 순풍의 성모 마리아 항구(Ciudad de la Santísima Trinidad y Puerto de Santa María del Buen Aire)’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명칭은 짧게 ‘부에노스아이레스(Buenos Aires)’라고 불렸다. 이것이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지명의 기원이다.

한편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은 생산과는 아무 관계가 없지만 ‘은의 여왕(La Reina del Plata)’라는 별칭도 갖고 있는데, 이는 라플라타 강(Rio de la Plata, ‘은의 강’이라는 뜻)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나. 식민지 시대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6세기 말 도시로서의 토대를 닦은 이후 계속 발전해 나갔다. 라플라타 강 하구에 위치한 항구는 에스파냐 식민지의 주요 무역항이 되었으며, 이로 인해 이 일대의 경제적, 사회적 중심지로 성장했다.

1776년 에스파냐는 식민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파라과이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에 리오데라플라타 부왕령(Virreinato del Rio de la Plata, 이하 라플라타 부왕령)을 설치하였고, 남아메리카의 중심 도시인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삼았다. 이를 계기로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크게 발전하였다. 1776년 2만 명이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인구는 1810년 4만 2,000명으로 증가하였다. 하지만 에스파냐와의 교역이 급감하면서 경제난을 겪게 되었고, 이에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797년 미국을 포함한 본국 외의 국가들과 자유 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 냈다.

에스파냐가 나폴레옹 전쟁(1797~1815)에서 프랑스에 패배하고 평화 협정을 맺는 틈을 타 1806년 영국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침공하여 시내를 점령하자, 라플라타 부왕 소브레몬테 후작(Rafael de Sobremonte, 1745~1827)은 도시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시민들은 1807년 2월에 훈타(Junta,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랑스에 저항하기 위해 에스파냐 본국 및 식민지에 설치되었던 일종의 임시 정부 성격을 가진 자치 조직)를 결성하고 영국군에게 저항하였으며, 결국 프랑스 출신 해군 장교 산티아고 데 리니에르스(Santiago de Liniers, 1753~1810)를 중심으로 한 민병대가 영국군을 격퇴하였다.

영국군은 이듬해 재침공했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식민지 현지인들이 자발적으로 영국군을 격퇴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지켜낸 이 사건은 남아메리카에서 독립 운동이 일어나는 밑거름이 되었다. 리니에르스는 도주한 소브레몬테를 대신하여 라플라타 부왕이 되었고, 상인 출신의 정치가 마르틴 데 알사가(Martín de Álzaga, 1755~1812)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회의 의장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대립을 하였으며, 모두 정치적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 푸른길

다. 아르헨티나의 독립과 혼란기

에스파냐 왕 카를로스 4세와 페르난도 7세를 연달아 폐위한 나폴레옹은 1808년 자신의 형인 조제프를 왕위에 앉혀 에스파냐를 프랑스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1809년 1월 알사가의 쿠데타가 일어났지만 진압되었다. 하지만 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훈타를 중심으로 한 독립 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나폴레옹이 앉힌 조제프 보나파르트 국왕에 반기를 들고 프랑스에게 저항하던 에스파냐의 세비야 훈타(Junta de Sevilla)는 1809년 2월 리니에르스를 대신하여 시스네로스(Baltasar Hidalgo de Cisneros, 1755~1829)를 라플라타 부왕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부임한 시스네로스가 독점 교역을 주장하면서 잠시 동안의 평온은 깨지고 말았다. 1810년 5월 오늘날 ‘5월 광장’으로 명명된 광장에서 시 의회가 개최되고,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훗날 ‘5월 혁명’으로 이름 붙여진 이 사건을 계기로 라플라타 부왕청은 붕괴되었고,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

5월 혁명 직후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군 지휘관 출신의 코르넬리오 사아베드라(Cornelio Saavedra, 1759~1829)와 마누엘 벨그라노(Manuel Belgrano, 1770~1820)가 주도하는 대평의회(Junta Grande)가 결성되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이외의 지역에서도 임시 평의회가 결성되었다. 하지만 일부 지역이 이들 노선에 반발하고 에스파냐 정부군과의 전투가 이어지는 등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평의회는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더욱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중앙 집권주의자(Unitarios) 세력과 연방주의자(Federalistas) 세력 간의 대립도 일어났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비롯한 남아메리카의 부진한 독립 운동은 에스파냐군 장교 출신의 산 마르틴(Jose de San Martin, 1778~1850)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혁명군에 투신한 그는 벨그라노를 도와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결국 1816년 3월 24일에 투쿠만(Tucumán, 아르헨티나 북서부에 있는 산미겔투쿠만 시를 가리킴)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수도로 하는 라플라타 합주국(Provincias Unidas del Rio de la Plata)이 선포되었고, 이로써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시작된 아르헨티나 독립 운동도 일단락되었다. 산 마르틴 장군은 아르헨티나 독립에 대한 공적을 인정받아 쿠요 주(Corregimiento de Cuyo)의 지사로 임명되었지만, 칠레, 페루 등의 독립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아르헨티나를 떠났다.

아르헨티나는 독립 후에도 내부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와 연방 정부는 1853년 헌법이 제정되고 아르헨티나 연방이 출범한 이후에도 계속 대립하였고, 1859년 11월에 이르러서야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연방에 통합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주도이기도 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연방의 일개 도시가 아닌 일종의 자치령으로의 존속을 요구했고, 1859년과 1880년에는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중앙 정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880년에 이루어진 헌법 개정으로 아르헨티나의 공식 수도가 되면서 연방 직할시가 되었고,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의 주도로서 새로운 도시 라플라타(La Plata)가 건설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가지 확장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가지 확장 ⓒ 푸른길

라. 성장과 번영

1880~1914년에는 농축산업의 발전과 수송 수단 및 냉동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아르헨티나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달하였고, 이에 아르헨티나의 노동력 부족과 유럽 인의 활로 모색을 향한 열망이 맞물려 유럽 인의 아르헨티나 이민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이 시기에 농축산물의 수출항이자 이민자들의 관문 역할을 했다. 당시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들은 주로 라보카(La Boca)의 항구 주변에 하층 주거지를 형성했으며, 이 과정에서 탱고가 발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아르헨티나 국토에는 경제 발전과 더불어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했고, 1915년에 건립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레티로(Retiro) 역은 20세기 초 세계 최대 규모라고까지 평가받았던 아르헨티나 철도망의 중심 기점 역할을 하였다. 1914년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지하철을 건설하는 등 대서양 연안에서 뉴욕 다음 가는 대도시로 번창하였다.

아르헨티나의 철도망 확장 과정(1870~1900년)

아르헨티나의 철도망 확장 과정(1870~1900년) ⓒ 푸른길

마. 페론 집권기와 군부 정권, 그리고 민주화

1943년 아르헨티나에는 국방장관 라미레스(Pedro P. Ramírez)가 주도한 쿠데타로 인해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군사 정권이 중립을 유지한 채 추축국과의 관계를 지속하자 미국에서는 아르헨티나에 대해 비난과 제재를 가했고, 1945년 9월 19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군사 정권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46년 2월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군부 출신의 후안 도밍고 페론(Juan Domingo Perón, 1895~1974)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페론은 ‘페론주의’라 일컬어지는 국가 주도 경제 정책을 실시하여 산업의 국유화, 노동자 권익 신장, 재정적 독립 등을 통한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경제적 위상을 높이려 노력했지만, 미국 등 서방 세계 및 국내 반대 세력과의 갈등으로 1955년 실각하고 말았다. 이 와중인 1953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폭동이 일어나 상당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후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아르헨티나는 군부 독재와 쿠데타가 이어지면서 국력이 피폐해졌고, 1982년 군부가 벌인 말비나스(Malvinas) 전쟁(‘포클랜드 전쟁’으로 많이 알려짐)도 결국 패배로 돌아갔다. 이 과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 광장을 중심으로 군부에 대한 시민의 저항이 표면화되었고, 군부 정권 당시 인권 침해 및 실종자 문제에 대해 항의하던 ‘5월 광장의 어머니들’의 활동이 계기가 되어 군부 통치가 종식되고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아르헨티나 민주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 광장은 오늘날에도 시민들의 집회 장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중남미의 주민 구성

중남미의 주민 구성 ⓒ 푸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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