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루이스의 역사

상루이스의 역사

가. 식민지 시기

상루이스는 브라질의 주도 가운데 유일하게 프랑스 인들이 처음 건설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원래 투피남바(Tupinambá) 족이 살던 곳이었지만, 1612년에 프랑스 인들에 의해 식민 역사가 시작되었다. 1612년 프랑스의 해군 장교 다니엘 드라 투셰(Daniel de La Touche)가 요새를 지었으며, 장차 ‘적도 지방의 프랑스(France Équinoxiale)’라는 식민지의 중심지로 삼으려고 하였다. 프랑스 왕인 루이 13세(Luís ⅩⅢ)를 기려 이 지방의 이름을 생루이(Saint Louis)라 불렀다.

3년 뒤인 1615년에 포르투갈 인 알부케르크(Jeromino De Albuquerque) 총독이 마을을 정복하고, 그 이름을 포르투갈 어 상루이스(São Luís)로 바꾸었다. 1641년에 네덜란드 인들이 이 도시를 침략하여, 1645년까지 머물렀다. 그들도 프랑스 인들과 마찬가지로 요새를 방어하는 데 급급했기 때문이 도시에 건축물이나 침략의 흔적 등을 남길 여유는 없었다.

1677년에 이 도시는 가톨릭교의 마라냥 상루이스(São Luís do Maranhão) 대교구의 소재지가 되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확정되자, 식민지 정부는 이 일대를 다른 식민지에서 떼어내 마라냥(Grão-Pará e Maranhão) 주로 승격시켰다. 당시 상루이스의 경제 기반은 농업, 특히 설탕, 카카오, 담배의 수출이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 푸른길

나. 근대에서 현대까지

마라냥 지방은 19세기 중엽까지 번영을 누렸다. 18세기 말, 영국의 직물 산업이 성장한데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일어난 미국의 독립전쟁(1776~1783)으로 면화 수송량이 감소하게 되자, 국제 시장에서 면화 가격이 상승하게 되었다. 브라질의 마라냥 지방은 이런 국제 정세의 덕을 톡톡히 본 경우이다. 마라냥의 면화 생산은 증가하고, 미국에서 면화를 운송하던 회사들이 마라냥에서 면을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상루이스는 이 시기에 경제적으로 황금기를 맞이하였으며, 한때 브라질에서 리우데자네이루, 사우바도르에 이어 3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가 되었다.

상루이스는 문화적으로도 융성하여, 브라질의 다른 도시들보다 유럽의 도시들과 관련이 깊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받아들인 최초의 도시였으며, 매주 프랑스 문학에 관한 최신 뉴스를 접할 수 있었다. 면화와 관련된 산업 등으로 큰돈을 벌은 사람들은 자녀를 헤시피, 사우바도르, 리우데자네이루 등의 대도시나 유럽과 같은 외국으로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유명한 작가와 시인도 많이 배출되었다. 상루이스 섬은 곤사우베스 지아스(Gonçalves Dias)를 비롯한 여러 시인과 작가들에 의해 ‘사랑의 섬’, ‘브라질의 아테네’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세기 말, 농업이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도시의 경제에도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1960년대 이래 도로와 철도로 다른 지역과 연결되자 비로소 오랜 은둔과 고립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화를 도모하게 되었다.

오늘날 상루이스는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이다. 브라질에서 16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상루이스 섬에는 상루이스 시 말고도 세 개의 도시(São José de Ribamar, Paço do Lumiar, Raposa)가 더 있으며, 이 도시들이 상루이스 광역 도시권을 이룬다. 브라질 지리통계청(Instituto Brasileiro de Geografia e Estatística, IGBE)의 추계에 따르면 이 광역 도시권의 2013년 연앙인구(年央人口)는 1,366,266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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