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시피의 역사

헤시피의 역사

헤시피는 브라질에서 포르투갈 사람들이 최초로 정착한 지역 중 하나이다. 1537년에 포르투갈의 주앙 3세(Juan Ⅲ)는 브라질을 식민 행정구(Capitania de Pernambuco)로 나누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넓고 먼 식민지에 투자할 인적 및 재정적 자원이 부족하여 극소수의 식민 행정구에서만이 번성을 누렸다. 그중 하나가 페르남부쿠 식민 행정구였다.

페르남부쿠는 사탕수수를 경작하기에 알맞은 땅과 기후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탕수수를 운송하기에 좋은 지리적 이점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사탕수수가 유럽 등지로 운반되면서 헤시피는 상업 중심지로 번창할 수 있었다. 브라질에서 생산된 설탕은 유럽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 푸른길

1580~1640년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왕국은 에스파냐의 통치 아래 일시 통합되었다. 에스파냐는 네덜란드와의 전쟁에 참여했고, 유럽에서 브라질 설탕의 주요 배급업자였던 네덜란드 인들이 브라질로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다.

네덜란드 인들은 사우바도르(Salvador)와 나타우(Natal)를 포함한 브라질의 몇몇 설탕 생산 도시를 침략하였다. 그들은 1630년에서 1654년까지 헤시피와 올린다(Olinda, 헤시피 바로 북쪽 교외에 있는 취락)를 지배했고, 헤시피를 네덜란드계 브라질의 새로운 수도인 모리츠슈타트(Mauritsstad) 시로 만들었다. 마우리시오 데 나소(Maurício de Nassau)는 네덜란드 출신의 건축가와 기술자로 구성된 팀을 꾸려 교량과 제방을 건설하고, 건물을 세웠다. 또한 포르투갈 인들과는 달리 마우리시오 데 나소는 유대교를 금지하지 않았다. 최초의 유대인 지역 사회와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유대교 회당이 이 도시에 건설되었다. 헤시피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많은 변화를 이끌었고, 모리츠슈타트를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시민들은 자력으로 네덜란드 인들을 추방하기 위해 싸웠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암스테르담(Amsterdam)으로 되돌아갔고, 포르투갈계 브라질 유대인은 뉴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유대인 공동체를 건설했다.

18세기 동안 헤시피에서는 올린다의 부유한 농민들과 헤시피의 무역업자들이 충돌했다. 헤시피는 올린다와 비교하여 명백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올린다는 항구가 없었지만 헤시피의 항구는 대서양 연안에서 가장 큰 항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헤시피의 승리는 사탕수수를 기반으로 한 올린다의 귀족들보다 중산층의 우위를 확고히 했다. 이것은 헤시피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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