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루오리존치의 역사

벨루오리존치의 역사

벨루오리존치의 역사는 과거 식민취락이 형성되었던 시기와 오늘날의 계획도시가 만들어진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벨루오리존치는 18세기 초에야 취락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반데이란치(bandeirante: 식민 시기에 브라질 내륙 지방의 무장 개척대원을 일컫는 말) 탐험가인 상파울루(São Paulo) 출신의 주앙 레이치 다 시우바 오르티스(João Leite da Silva Ortiz)가 건설하였다. 금을 찾아 내륙을 탐사하던 오르티스는 1701년 이 지역에 정착했고, 골드러시(gold rush) ‘왕의 목장’이란 뜻의 ‘쿠하우델헤이(Curral del Rey)’ 농장을 건설하였다. 농장의 부와 성공으로 주변 지역 사람들이 이주해 오게 되자, 농장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이루었다.

이 마을이 성장한 데에는 상프란시스쿠 강 유역에서 온 이주민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주민들은 브라질 남부 지방으로 가려면 쿠하우델헤이를 통과해야만 했고, 이들은 나무로 지은 작은 예배당에 와서 안전한 여행이 되도록 기도하였다. 이후 이 예배당은 ‘좋은 여행의 성모 마리아 성당’이란 의미의 카펠라 다 노사 세뇨라 다 보아비아젱(Capela da Nossa Senhora da Boa Viagem)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벨루오리존치가 건설된 후, 바로크 양식의 이 오래된 예배당은 신고딕 양식의 교회로 대체되어 이 도시의 대성당이 되었다.

오늘날의 대도시 벨루오리존치의 역사는 19세기말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수도를 오루푸레투(Ouro Preto)에서 벨루오리존치로 옮기면서 새로 시작된다. 오루푸레투는 벨루오리존치에서 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래된 광산촌이다.

오루프레투는 원래 부촌이란 뜻의 ‘빌라히카(Vila Rica)’라고 불린 도시로, 브라질 군주제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1889년 브라질이 독립하여 공화국이 되었을 때, 에스피냐수 산지 속에 자리 잡은 오루프레투에는 날로 확장되는 시가지를 담을만한 공간이 부족하였다. 이에 번영을 구가하는 미나스제라이스 주의 위상을 담을만한 새 주도를 만들자는 의견이 모이게 되었다. 1893년 당시 미나스제라이스의 주지사였던 아폰수 페나(Afonso Pena)는 여러 후보 도시들 중에서 기후와 지형적인 조건을 고려하여 쿠하우델헤이를 주의 새로운 경제적·문화적 중심지로 선정하였고, ‘미나스 시(Cidade de Minas)’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었다.

미나스 시는 파라 주 출신 도시계획가인 아랑 헤이스(Aarão Reis)가 그 설계에 착수하였다. 아랑 헤이스와 프란시스쿠 비칼류(Francisco Bicalho)는 미국의 워싱턴 D.C.로부터 영감을 얻어 도시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후 미나스 시는 브라질 정부가 최종 완성 기한으로 정한 1897년에 아직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로 출범하였다. 주 정부는 거주민에게 공터 무료 사용 허가권과 집을 지을 때 자금을 지원하는 등 보조금을 지원하였다. 벨루오리존치 도심 거리의 특징은 가로망을 직교형 및 대각선 대칭 배열로 구성하고, 가로마다 브라질의 각 주 및 원주민의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도시의 공공 기능은 콘토르누 거리(Avenida do Contorno: 도심을 둥그렇게 감싸는 모양의 환상 도로) 이내에 입지시키고, 주거지는 이 환상도로의 밖에 분포하도록 설계되었다.

1906년에 이 계획도시의 이름은 지금의 ‘Belo Horizonte’로 바뀌게 된다. ‘아름다운 지평선’이라는 뜻을 담은 이 이름은 이 도시의 지형적 특색 뿐 아니라 계획도시로서 시가지의 스카이라인의 특성도 함께 함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 벨루오리존치는 배후지의 광공업을 기반으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하였다. 1920년에 이 도시는 인구는 5만 5천여 명이었다가, 30년 뒤인 35만 명, 다시 30년 뒤인 1980년에는 200만 명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연관목차

56/1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