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파울루의 역사

상파울루의 역사

가. 식민지 시기

상파울루는 브라질의 다른 식민 도시와는 달리 내륙 고원의 조그만 마을에서 시작하였다. 1553년 포르투갈 인들이 산투안드레다 보르다두캄푸(Santo André da Borda do Campo)를 건설하였지만, 원주민의 공격이 끊이지 않아 정착촌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이후 이곳을 찾은 예수회 신부들은 이곳이 해안보다 더 선선하여 열대 풍토병에 걸릴 염려가 적고, 물이 풍부하여, 터전을 정하기에 좋은 지역이라고 판단했다. 1554년 1월 25일 예수회의 호세 데 안시에타(José de Anchieta)와 마누엘 다 노브레가(Manuel da Nóbrega) 신부가 타만두아테이(Tamanduateí) 강과 아냔가바우(Anhangabaú) 강 사이의 높은 언덕에 상파울루를 세웠다. 신부들은 이곳에 예수회 학교를 설립하였고, 학교를 중심으로 취락이 형성되었다. 선교취락이 세워진 날이 사도 바울의 개종일과 같다고 하여 그 취락의 이름이 상파울루로 정해졌다.

브라질의 다른 도시들에 비해 일찍 건설된 내륙 도시였지만, 자원이나 항구가 없어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식민 도시로 성장했다. 1500년에 브라질을 발견한 후에도 포르투갈 인들은 상파울루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1560년에 하나의 마을로 인정받기는 했지만, 해안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서 교역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상파울루 지역의 토양이 당시 부의 원천이었던 사탕수수 재배에도 적합하지 않아서 경제적으로 영향력이 있는 취락은 아니었다. 1711년에 시로 승격되었지만, 자원을 찾기 위해 내륙 쪽으로 탐험을 떠나는 무장탐사대(Bandeirantes)에게 해안 지역과 내륙 지역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주된 역할이었다. 상파울루를 거쳐 오지로 떠났던 무장탐사대는 상파울루에 경제적으로 기여한 것보다는 브라질의 식민지가 내륙으로 확장하는 데 많은 기여하였다.

나. 독립과 커피 재배

3세기 동안 소도시에 불과하였던 상파울루는 1822년 브라질이 마침내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하고, 상파울루 주의 주도가 되면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상파울루 대학교 법과대학(Faculdade de Direito da Universidade de São Paulo)을 중심으로 법률 학교를 세우고 신문과 관련 서적을 발간하는 등 법학의 중심지가 되면서 성장하였다.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커피로 인해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커피시장이 성장하면서 커피는 브라질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상파울루의 토양과 기후가 커피 경작에 적합한 상파울루 동북부와 리우데자네이루 서남부의 파라이바 강 유역(Vale do Paraíba)에서 커피 재배지가 점차 확장하게 된 것이다.

커피 산업의 성장은 커피 생산에 필요한 노동력 때문에 인구 성장으로 연결되었다. 초기에는 동북부에서 이주해온 노예들이 커피 생산 작업에 투입되었다. 노예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유럽의 이민자들이 도시로 유입되었다. 이민의 증가는 상파울루를 급속도로 팽창시켰다. 그 속도는 1895년 13만 명이었던 상파울루의 인구가 불과 5년이 지난 1900년에 24만 명으로 늘어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유럽 인의 이민 중에서는 특히 이탈리아 인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다. 산업화 시기

19세기 중엽 상파울루가 행정 및 문화의 중심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커피로 얻은 이윤은 도시의 다른 산업에 투자되었고, 아프리카 계 브라질 인(Afro-brasileiro)들은 커피 농장을 떠나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된 상파울루의 다른 공업 분야에 종사하게 되었다. 상파울루에서 노동자들은 출신 지역에 따라 모여 살면서 상파울루 지역에 특정 지구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향은 아프리카 계 브라질 인뿐만 아니라 다른 이민자 집단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도시가 경제적으로 성장하자, 도시의 규모도 이전 구시가지에서 벗어나 확장되었다. 수원(水源)을 확보하기 위해 저수지를 만들고, 거리에는 전차가 다니고, 가스등이 설치되었다. 철도가 지나가는 주변 지역에는 공장이 들어서고, 이 공장의 노동자들이 집중되었다. 비시가(Bixiga) 지역에는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1891년에는 오늘날 금융 기관이 밀집한 상파울루의 중심가인 파울리스타 대로(Avenida Paulista)가 건설되었다. 1892년에는 새롭게 확장되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이어주는 고가도로인 비아두투두샤(Viaduto do Chá)가, 그리고 1901년에는 루즈 기차역(Estação da Luz)이 건설되었다. 특히 파울리스타 대로에는 부유층인 커피 농장주들이 주로 모여 살았다.

아프리카 계 브라질 인들은 관공서의 심부름꾼, 점원과 같은 일용직에 종사하거나, 상파울루의 산타세실리아(Santa Cecilia), 바하푼다(Barra Funda), 캄푸스엘리제우스(Campos Eliseos)에 정착하여 백인 가정의 하인이나 가정부로 일하기도 했다. 또한 이들은 철도 건설이 진행되고 있던 상파울루 동부의 페냐(Penha)를 비롯한 도시 외곽 지역에 정착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계 브라질 인들은 대부분 빈민가(파벨라: favela)에 거주하였는데, 현재 브라질의 거의 모든 도시의 외곽 지역에는 빈민가가 형성되어 있다.

라. 현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파울루에는 기차, 전차, 전기, 전화, 자동차 등이 도입되었고, 도로가 포장되었다. 지역을 이어주는 많은 연결로와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시내 곳곳에 휴식 공원이 만들어져,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발전되었다.

유럽의 소식이나 유행, 유럽산 수입품도 빠르게 유입되어 상파울루의 상류층에 공급되었다. 1911년에는 상파울루 시립극장(Theatro Municipal de São Paulo)이 건설되었고, 각종 문화 행사가 열렸다.

부의 효과가 긍정적으로 나타난 측면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으로 나타난 측면도 있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은 낮았고, 노동 시간은 길었으며, 여러 가지 질병에 노출되어 있는 등 매우 열악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세계적인 조류 중의 하나였던 무정부주의가 유럽 이민자들에 의해 유입되어, 1917년에는 대규모 장기 파업이 일어나는 등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1930년에 대공황이 시작되면서 브라질의 커피 경제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고, 이전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던 국내 정치에서 상파울루의 입지가 축소되었다. 정치적인 변화와는 반대로 이 시기에 상파울루에는 교육과 과학에 관련된 중요한 새로운 기관들이 설립되었다. 1933년에 행정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한 정치사회학 학교(Fundação Escola de Sociologia e Política de São Paulo)가 세워졌다. 1934년에 현재 브라질을 대표하는 대학인 상파울루 대학교(Universidade de São Paulo)가 설립되었다. 같은 해에는 당시에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마르티넬리 빌딩(Edifício Martinelli)이 세워졌다.

1950년대에 접어들어 상파울루의 도로는 자동차 통행을 위해 대부분 정비되었고, 상파울루에서 자동차 산업이 성장하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도시의 지속적인 팽창에 따라 도시 중심의 지가(地價)가 나날이 높아졌다. 따라서 상파울루에 집중되어 있던 산업 시설들은 주변의 위성 도시로 빠져 나가고, 산업의 이심화가 시작되었다.

1970년대에 들면서 점진적으로 진행되던 위성 도시로의 산업 시설 이전은 더욱 진전되었고, 도시의 기능이 종래 제조업 중심에서 서비스와 상업의 중심지로 변화하였다. 이에 따라 백화점이나 대형 슈퍼마켓, 기업의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상업 센터가 생겨났다. 즉, 생산은 위성도시에서 하고, 그 통제와 거래는 상파울루의 중심 도시에서 이루어지는 형태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러한 도시 기능의 변화는 도로 계획에도 반영되었고, 1969년에는 지하철이 건설되었다. 도시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빈부 격차, 실업, 대중교통, 주거, 환경 문제와 같은 사회 문제가 더욱 많아졌고, 다양한 형태로 발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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