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탈레자의 역사

포르탈레자의 역사

포르탈레자는 포르투갈 어로 ‘요새’라는 뜻이다. 동북 지방은 브라질의 다른 지방들보다 유럽에서 가까워 일찍부터 유럽과의 접촉이 시작되었고, 이 도시의 식민 역사는 16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1500년 2월에 에스파냐 사람 비센테 핀손(Vicente Pinzón)이 무쿠리페 만에 도착해 이 지역에 ‘산타마리아 데 라 콘솔라시온(Santa Maria de la Consolació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 발견은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사이에 맺었던 토르데시야스 조약(Tratado de Tordesillas, 1494년) 때문에 공식적으로 승인받지 못했다. 식민지화는 1603년 포르투갈 사람 페루 코엘류 지 소우자(Pero Coelho de Souza)가 상티아구(São Tiago) 요새를 만들고, 노바 리스보아(Nova Lisboa)라는 정착지를 건설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 후 네덜란드 인이 브라질 동북 지방을 점령하고 스쿠넨보르시(Schoonenborch) 요새를 만들었다. 이들이 세아라에서 쫓겨난 뒤 다시 포르투갈 인들이 이곳을 포르탈레자 지 노사세뇨라 다 아순상(Fortaleza de Nossa Senhora da Assunção, ‘승천하신 성모 마리아의 요새’라는 뜻)라고 불렀다. 1726년 이 요새는 마을로 승격되었다. 1799년 세아라 주는 페르남부쿠(Pernambuco) 주에서 분리되었고, 포르탈레자가 주도로 결정되었다.

19세기 동안 포르탈레자는 면화 산업을 바탕으로 세아라 주의 중심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유럽과의 항해가 활발해지면서 1812년에는 포르탈레자 세관이 만들어졌다. 포르탈레자는 19세기 중엽에 면화 수출로 큰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면서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1870~1880년은 ‘노예제 폐지론자와 공화주의자의 기간’이라고 불린다. 이 운동은 1884년 3월 25일 세아라 주에서 노예였던 아프리카계 브라질 인들을 해방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4년 후에는 브라질 전국적으로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다.

20세기에 들어 커다란 도시 변화를 겪었는데, 1910년대 말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일어난 이촌향도 현상이 대표적이다. 이 때문에 포르탈레자는 1922년에 메세자나(Messejana)와 파란가바(Parangaba)를 합병하여 인구 10만 명을 돌파하고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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