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우데자네이루의 역사

리우데자네이루의 역사

가. 식민지 시대

1502년 포르투갈의 탐험대가 처음으로 리우데자네이루를 발견하고 나서 몇 년이 지난 후에 프랑스의 상인들은 예전부터 경제적, 전략적 중요성이 잘 알려진, 리우데자네이루 동쪽에 있는 프리우(Frio) 곶에서 구아나바라 만의 해안과 섬에 이르는 지역을 탐험하고, 이 지역의 여러 섬 가운데 하나를 ‘남극 프랑스(France Antarctique)’라는 이름의 식민지로 건설하였다. 이후 포르투갈은 1565~1567년의 2년에 걸친 프랑스와의 전쟁 끝에 프랑스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도시의 터를 마련하기 위해 내륙으로 들어갔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 푸른길

포르투갈 정착민들은 포르투갈 왕이 분배한 기름진 토지에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고, 사탕수수는 식민지의 주요 소득원이 되었다. 1660년에 이 지역은 브라질 남부 사령관령(Repartição do sul)의 소재지가 되었다. 17세기 말에 인구는 8,000명으로 늘어났고, 그중 3분의 2는 원주민과 흑인 노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브라질은 18세기 초에 금과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는 식민지 경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유럽으로부터 대규모 이민을 촉진하여 백인 인구가 증가했다. 이전에는 촌락에 지나지 않았던 곳이 1749년에는 인구 24,000명의 도시가 되었고, 1763년에는 식민지 수도를 동북 지방의 사우바도르(Salvador)에서 리우데자네이루로 이전하였다.

18세기 말에는 광산이 쇠퇴하고, 설탕 시장을 놓고 벌인 중앙아메리카와의 경쟁에서 밀려 리우데자네이루뿐만 아니라 식민지 전체가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1796년에는 리우데자네이루 항을 통해 이루어진 수출이 1760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브라질에서 커피를 생산하게 되고, 1808년에 포르투갈 왕실이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겨 오면서 식민지는 다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1803~1818년까지 600채의 주택과 100채의 대지주 저택과 별장이 건축되었고, 많은 옛 건물들이 복구되면서 도시의 초기 모습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토지를 개간하고, 거리는 밝아졌으며, 도로가 포장되거나, 새 도로가 건설되기도 하였다. 왕립 출판사, 왕립 도서관, 산투주앙(Santo João) 극장, 예술원, 식물원, 브라질 은행 등이 세워졌다. 1821년에 주앙 6세(João Ⅵ)가 포르투갈로 돌아갈 때 리우데자네이루의 거주자는 11만 명에 이르렀고, 1만 3,500채의 건물이 들어섰으며, 도시는 북쪽과 서쪽으로 확장되었다.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이루어진 도시

아프리카 노예 무역이 이루어진 도시 ⓒ 푸른길

나. 독립 후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는 1822년 브라질 왕국으로 독립한 뒤에도 수도였다. 이 시기에 브라질에서 커피, 목화, 설탕, 고무 등의 수출이 늘어났고, 리우데자네이루는 더욱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배후지의 커피 경작이 확대되면서 도시의 모습은 새롭게 변해갔다. 1829년 당시 가장 아름다운 거리였던 루아두오비도르(Rua do Ouvidor)에서는 더 이상 달구지가 통행할 수 없게 되었다. 1838년에 말이 끄는 최초의 대중 교통수단이 생겨났고, 1835년에는 증기선이 다니기 시작하였다. 1852년에 최초의 철도가 부설되었고, 1854년 가스등과 전보가 등장하였다. 1864년에 하수도, 1868년에 최초의 시내 전차가 도입되었다. 1877년에 전화 서비스가 공급되면서 도시 기반 시설의 많은 부분이 갖추어졌다.

다. 공화국 시대

1889년에 브라질 공화국의 수도가 된 리우데자네이루는 이미 대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1890년 인구 조사에서 인구 52만 명, 면적 218.6㎢로, 브라질의 최대 도시이자, 세계 도시 반열에 들어섰고, 1891년에 제정된 헌법에 따라 연방 직할구(Distrito Federal)가 되었다. 보건 환경이 개선되어 풍토병인 황열병과 천연두가 퇴치되었다. 거대한 늪지에 배수 시설을 갖추었으며, 맹그로브 숲을 제거하여 모기가 사라졌다. 불량 주택을 철거하고, 거리를 개량하는 등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중심부에서 가장 중요한 거리인 히우브랑쿠 대로(Avenida Rio Branco)가 이때 개통되었고, 남부 해안 지대를 따라 달릴 수 있는 베이라마르(Beira-Mar) 대로가 매립지 위에 건설되었다. 리우데자네이루의 인구가 1920년경 100만 명을 넘어 1940년에는 175만 명까지 증가하였다. 이 기간에 도시의 산업 설비가 거의 3배나 증가했고, 최초의 고층 건물이 등장하였다.

주거지가 동쪽 해안으로 확장되면서 북쪽 일부 지구는 산업과 저소득층 주거지로 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급격한 이촌향도 현상으로 말미암아 부동산 개발이 활성화되고, 도시의 주거지는 계층별로 분화되었다. 자동차 교통이 보편화되어 고속 도로의 확장이 이루어졌고, 새로운 교통로가 건설되었다. 소규모 주택이나 아파트 대신 대규모 주거 건물이 건설되는 등 도시는 크게 변화했다. 1960년에는 연방 수도가 브라질리아로 옮겨 가면서 200년 가까이 유지했던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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