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바도르의 역사

사우바도르의 역사

가. 식민지 시기

토두스우스산투스 만은 1500년에 포르투갈 인들에 의해 최초로 발견되었다. 이 만이 개신교의 축일 가운데 하나인 만성절(All Saints' Day, 11월 1일, 모든 성인의 축일)에 발견되었다 하여 축일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듬해인 1501년에 가스파르지레무스(Gaspar de Lemos)는 이 만을 포함하여 바이아(Bahia) 지방의 해안 일대를 항해했고, 1531년에는 신대륙 탐사대를 이끈 아폰수 지 수자(Martim Afonso de Sousa)가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곳 해안에 상륙하였다.

사우바도르에 취락이 세워진 것은 1549년 브라질 최초 총독인 투메 지 수자(Tomé de Sousa)에 의해서였다. 그는 포르투갈 인들을 실은 함대를 이끌고 와서, 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이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로서 사우바도르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식민지 브라질의 첫 수도가 되었다. 1552년에는 브라질 최초로 가톨릭 주교 관구의 소재지가 되어, 오늘날에도 브라질 가톨릭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

1583년 무렵 이 도시의 인구는 1,6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넓고 깊은 만이 주변에 있어 우수한 자연 항구를 갖추고 있으며,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인 사우바도르는 곧 해적 및 포르투갈과 경쟁 관계에 있던 세력들에게 표적이 되었다. 1624년 5월에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피트 헤인(Piet Hein) 제독은 이 도시를 약탈하였으나, 이듬해인 1625년 5월에는 에스파냐-포르투갈 연합 함대가 이를 탈환하였다. 이후 사우바도르는 포르투갈 식민지를 넘보는 세력들에 대항하는 거점이 되었고, 대서양 연안의 주요 항만으로서 일대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생산되는 설탕과 아프리카 노예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 푸른길

나. 수도의 이전 이후

사우바도르가 식민지 수도가 된 지 200여 년이 지난 1763년에 식민지 수도를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겨 가게 되자 정치적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더구나 사탕수수 산업의 쇠락과 함께 브라질 남부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광업이 발전하고 커피 재배가 성공하면서 경제적 중심도 남부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후 150여 년 동안 사우바도르는 브라질 경제 성장의 흐름에서 벗어난 채 침체일로를 걸었다.

사우바도르를 포함한 바이아(Bahia) 주 일대가 오랜 침체를 겪었다고는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브라질 전역에서 일어난 도시화의 추세에서 예외가 된 것은 아니었다. 1948년에 약 34만 명이 거주하던 이 도시의 인구는 60여 년이 지나는 동안 무려 열 배 가까이 증가하여 2013년에는 288만여 명을 헤아리는 큰 도시가 되었다. 이와 같은 증가는 1960년대 이래 배후지의 산업 개발,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 이동이 그 주요 배경이다.

사우바도르가 과거 식민 수도로 영화를 누렸던 만큼, 오늘날에도 브라질 문화와 관광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1990년대에는 도심의 역사 지구인 펠로리뉴(Pelourinho)를 정비하고 복원하는 사업이 추진되어, 이곳에 사우바도르의 관광 업체가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도심 재생 사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수천의 주민들이 도시 외곽으로 강제로 이주되어 사회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는 두 개의 브라질이 있었다.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를 중심한 남부 3분의 1은 커피 재배와 목축업을 바탕으로 호황을 누리는 브라질이었고, 나머지 3분의 2, 특히 동북 지방은 남부에 비해 부족한 지하자원과 건기의 가뭄으로 어려움을 겪는 브라질이었다. 이러한 2분법은 21세기인 지금도 어느 정도 지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사우바도르가 브라질 내에서 인구 규모 제 3위 도시(지역 총생산 10위)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배후 지역 전체의 경제 침체를 얼마나 빨리, 그리고 얼마나 잘 극복하느냐에 이 도시의 미래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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