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시티의 사회

멕시코시티의 사회

가. 인구 성장

멕시코시티 광역 도시권은 인구 2천만 명 이상의 거대 도시로 성장하였지만, 불과 100여 년 전인 1900년에 멕시코시티 인구는 50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멕시코시티의 인구가 가장 급격히 증가한 시기는 1940~1970년대로, 이 시기에 대규모의 촌락 인구가 도시로 이주했으며, 당시 멕시코시티는 가장 주요한 목적지였다. 국토의 중앙에 위치하여, 기회와 풍요의 도시 이미지가 전국적으로 퍼져 있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제조업 분야와 행정 기능의 지방 이전이 장려되고, 경제 위기로 인해 멕시코시티의 경제적 상황이 악화됨으로써 고용 기회가 줄어들자 멕시코시티의 인구 성장은 둔화되었다. 최근 광역 도시권의 인구 증가율은 1% 미만이며, 이는 대부분 자연 증가에 의한 것이다.

초기 이주민들은 반경 120㎞ 이내에서만 이주해 왔지만, 20세기 말 이주민의 출신 지역 범위는 1,500㎞로 확대되었다. 오늘날 멕시코시티로 유입하는 인구는 주로 남부의 빈곤한 촌락 지역 출신이며, 부유한 유출 인구는 범죄와 오염도가 낮은 멕시코시티의 외곽과 북부 지역의 도시로 이주한다. 도시의 거대화로 인한 공해, 주택, 교통 문제 등으로 다수의 멕시코시티 사람들이 쾌적한 환경을 찾아 톨루카(Toluca) 및 쿠에르나바카(Cuernavaca) 등의 위성 도시로 이전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1985년에 일어난 멕시코시티 지진은 이러한 경향을 가속화시켰다.

멕시코의 중부축과 위성 도시

멕시코의 중부축과 위성 도시 ⓒ 푸른길

나. 도시 성장

멕시코시티의 범위는 일반적으로 연방 직할구 및 멕시코 주의 일부인데, 멕시코시티의 기능과 범위가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어서 한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멕시코시티의 범위는 시기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동서로 약 90㎞, 남북으로 약 110㎞ 이상으로 본다. 인구가 집중된 연방 직할구는 동서로 45㎞, 남북으로 60㎞에 이르며, 16개의 구(Álvaro Obregón, Azcapotzalco, Benito Juárez, Coyoacán, Cuajimalpa, Cuauhtémoc, Gustavo A. Madero, Iztacalco, Iztapalapa, Magdalena Contreras, Miguel Hidalgo, Milpa Alta, Tláhuac, Tlalpan, Venustiano Carranza, Xochimilco)로 이루어진다. 북으로는 과거 테노치티틀란이 위치하였던 센트로 및 소칼로 지역으로부터 남으로는 멕시코 국립 자치대학, 동쪽으로는 차풀테펙 공원으로부터 서쪽으로는 멕시코시티 공항에 이른다. 멕시코시티 광역 도시권은 연방 직할구를 중심으로 멕시코 주와 이달고 주를 포함하는데, 2010년 현재는 총 54개의 시(Municipio)에 걸친다.

다. 주민 구성

멕시코의 주민은 크게 멕시코 출신의 백인(크리오요: criollo), 백인과 인디오의 혼혈인(메스티소: mestizo), 원주민(인디오: indigena, amerindio)으로 구성된다. 이 밖에 유대 인을 비롯하여 아시아 인도 거주한다. 메스티소는 좁은 의미로는 백인과 인디오 간의 혼혈인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혼혈인 전체를 나타내며, 나아가 유럽 문명과 아스텍, 마야 문명이 만나 이루어진 멕시코의 문화와 사회의 특징을 가리키기도 한다. 멕시코 혁명 이후 1930년대에 교육부 장관을 지낸 호세 바스콘셀로스(Jose Vasconcelos)는 메스티소를 ‘범우주적 인종(La raza cósmica)’이라 일컫고 인류의 가장 궁극적인 진화상으로 예찬하기까지 하였으며, 이를 국가 정신의 중심으로 내세우고 있다.

멕시코에서 원주민의 정체성은 인종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측면이 강하다. 즉, 부모가 모두 원주민의 혈통이더라도, 에스파냐 어를 배우고 정식 교육을 받으며, 원주민의 문화를 따르지 않으면 원주민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 원주민 문화의 지표로서 고유 언어 사용을 꼽고 있으며, 각 부족의 언어는 독특하여 부족 구분의 기준이 된다. 전국적으로 약 68개의 원주민 언어가 있고, 이 밖에도 수많은 방언이 있으며, 600만 명 이상의 원주민이 있다. 가장 주된 원주민 언어는 중앙 지역의 나우아틀 어와 유카탄 반도의 마야 어로, 원주민의 약 36%가 두 언어 중 하나를 사용하고 있다. 원주민 인구의 대부분은 농촌에 거주하고 있으며, 100만 명 정도의 원주민이 멕시코시티에 거주하고 있다.

라. 종교

멕시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과달루페 성모(Nuestra Señora de Guadalupe)를 믿는다. 일상생활 곳곳에서 갈색 얼굴의 원주민 모습인 과달루페 성모를 섬기는 것을 볼 수 있다. 과달루페 성모는 식민 초기 멕시코시티의 테페약(Tepeyac) 지역에서 나타났다고 전해진다. 1531년 12월 9일 새벽녘에 원주민인 후안 디에고(Juan Diego)가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멕시코시티로 향하고 있었다. 테페약 산에 이르렀을 때, 원주민의 모습과 비슷한 갈색 얼굴의 성모가 나타나 예배당을 짓고 이름을 코아탈호페(Coatalxope, 뱀을 무찌른 여인이라는 의미)로 지으라고 하였다.

그는 멕시코시티의 주교에게 이야기하였으나 이를 믿지 않자, 겨울에는 피지 않는 장미꽃을 주었다. 장미꽃을 받은 주교는 이를 믿고 그 자리에 예배당을 건설하였다. 성모의 이름은 음성학적으로 코아탈호페와 비슷한 에스파냐 어인 과달루페(Guadalupe)가 되었고, 예배당의 이름 역시 과달루페 성당(Basílica de Santa María de Guadalupe)이 되었다. 이 성당은 멕시코시티의 북쪽에 있으며, 지진으로 성당이 기울어 새로 건축하였다. 성모의 발현 이후 원주민들은 빠르게 가톨릭교로 개종하였으며, 멕시코는 독립 이후 과달루페 성모를 국가의 수호자로 인정하고 12월 12일을 발현일로 정하였다.

과달루페 성모의 발현에 대한 진위 여부는 의견이 분분하다. 성모가 나타난 테페약은 아스테카 부족의 대지의 여신인 토난친(Tonāntzin)의 신전이 있던 곳으로, 원주민 모습의 성모는 가톨릭교와 원주민의 토착 신앙을 결합시킨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1895년 로마 교황이 과달루페 성모를 인정하였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hannes Paulus Ⅱ)는 테페약의 과달루페 성당에 직접 방문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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