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크루스의 역사

베라크루스의 역사

가. 식민 이전과 식민 시기

베라크루스 지역에 대한 첫 번째 탐험은 1518년에 에스파냐의 대장인 후안 데 그리할바(Juan de Grijalva)가 산후안데울루아 요새(Fort San Juan de Ulúa)라고 불리는 섬에 도착한 것이었다. 이 탐험대는 이 지역에 금이 생산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파견되었다. 두 번째 탐험은 1519년에 에르난 코르테스(Hernán Cortés)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코르테스는 이 지역을 비야리카데라베라크루스(Villa Rica de la Vera Cruz)라고 하였다. 당시 코르테스가 처음 비야리카(Villa Rica)를 건설한 곳은 현재의 베라크루스 구시가지가 아니라 키아우이스틀란(Quiahuiztlan) 근처였다. 이후 아스테카(Azteca)를 정복하고 난 1524년에 안티과(Antigua)로 도시를 이전하여 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성당을 지었으나, 1599년에 현재 베라크루스의 위치로 도시를 옮겼다. 베라크루스 항은 1604년 도시의 지위를 얻었고, 1640년에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Felipe III)로부터 멕시코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인정을 받았다.

식민 기간 동안 베라크루스는 멕시코시티와 에스파냐를 잇는 가장 주요한 항구였다. 식민 시기 베라크루스에는 상인 계층을 비롯한 부유층이 대거 거주하였으며, 세관이 설치된 부유한 도시였다. 베라크루스 항을 통하여 금은뿐 아니라 터키석과 같은 보석류, 그리고 옥수수, 콩, 아보카도, 면화 등의 농작물도 에스파냐로 수출되었다. 에스파냐에서는 밀, 쌀 가금류, 섬유, 포도주 등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상품이 수입되었다.

16세기 말 에스파냐 인들은 내륙 지역의 금과 은을 에스파냐로 수송하기 위해 베라크루스와 코르도바(Córdoba), 오리사바(Orizaba), 푸에블라(Puebla), 할라파(Jalapa), 페로테(Perote) 등의 도시 간에 도로를 건설하였다. 에스파냐로 향하는 금과 은이 모였고, 이후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Virreinato de Nueva España)에서 생산된 금은뿐 아니라, 필리핀 마닐라(Manila) 항에서 태평양 연안의 아카풀코(Acapulco), 멕시코시티를 거쳐 수송된 도자기, 비단 등 동양의 상품들도 베라크루스 항으로 집중되었다. 이 때문에 베라크루스는 식민 기간 동안 해적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이에 산후안데울루아 요새의 방어 시설이 강화되었으며, 바를로벤토 전함대(Armada de Barlovento)가 배치되었다. 이 전함대는 아메리카 지역에서 생산된 금과 은을 에스파냐로 수송하는 선단(flotas)을 유럽 열강의 해군과 해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17세기 중엽에 설립되었다.

식민 시기 에스파냐 무역선단의 항해 경로

식민 시기 에스파냐 무역선단의 항해 경로 ⓒ 푸른길

나. 독립 이후

19세기 멕시코에는 정치적・사회적 혼란이 지속되었으며, 잦은 전쟁에 휘말렸다. 당시 멕시코의 가장 주요한 항구였던 베라크루스는 특히 여러 전쟁의 현장이 되었다. 19세기 초 멕시코 독립 전쟁 당시 에스파냐는 해로상의 연결을 유지하기 위하여 베라크루스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1820년에 베라크루스는 혁명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1821년 누에바에스파냐의 마지막 부왕인 후안 오도노후(Juan O’Donojú)와 훗날 멕시코의 첫 번째 황제가 된 아과틴 데 이투르비데(Aguatín de Iturbide) 장군이 베라크루스의 산후안데울루아 요새에서 코르도바 조약(Tratados de Córdoba)에 서명함으로써 멕시코는 독립을 이루었다. 독립 이후, 산후안데울루아 요새에 남아 있던 에스파냐 군대가 1823년에 베라크루스 시가지를 향하여 함포 사격을 하였는데, 이 사건 이후 베라크루스는 첫 번째 ‘시우다드에로이카(Ciudad Heroica, 영웅 도시)’ 칭호를 받았다. 1838년 제1차 프랑스-멕시코 전쟁(일명 과자전쟁, Guerra de los pasteles) 당시 프랑스군이 멕시코 만의 모든 항구를 봉쇄하고 베라크루스를 함락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베라크루스는 두 번째 ‘시우다드에로이카’ 칭호를 받았다. 멕시코-미국 전쟁(1846~1848) 기간 중 1847년에 미국이 베라크루스를 침공하여 며칠 만에 함락하였다. 이후 베라크루스는 세 번째 ‘시우다드에로이카’ 칭호를 받았다.

1857년 멕시코의 자유당파와 공화당파 간에 내전이 발생하자, 당시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Pablo Juárez García) 대통령은 정부를 멕시코시티에서 베라크루스로 이전하였다. 이후 후아레스 대통령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에 대한 채무 불이행을 선언하자, 1861년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하였다. 에스파냐는 1861년 베라크루스에 군대를 입성시켰으며, 프랑스군은 1864년에 베라크루스 항을 점령하여 그들이 추대한 막시밀리아노 1세(Maximiliano Ⅰ)를 베라크루스를 통해 입국시켰다.

19세기에 이어진 여러 전쟁으로 말미암아 베라크루스는 세관 수입에 커다란 손해를 입었으며, 도시 및 항구 시설도 황폐화되었다. 포르피리오 디아스(Porfirio Díaz) 대통령은 외국계 기업을 유치하여 현대적인 항구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멕시코 혁명(1910~1920)이 일어나자 1914년에 미국이 멕시코를 침공하였으며, 무역을 지속하기 위하여 베라크루스를 점령하였다. 이 사건으로 베라크루스는 네 번째 ‘시우다드에로이카’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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