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마의 역사

리마의 역사

가. 에스파냐 정복 이전

리마 인근 지역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수천 년 전부터이지만, 도시 공동체가 나타난 것은 9세기 무렵으로 추정된다. 리마에서 남쪽으로 약 40㎞ 떨어진 곳에 위치한 파차카막(Pachacámac)에는 2~16세기에 건설된 사원 및 복합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파차카막의 건물 대부분이 9~15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9세기 무렵부터 사람들이 이 지역에 대규모로 거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파차카막을 비롯한 리마 일대는 15세기 중엽 이 지역에 세력을 떨치던 잉카 제국에 포함되었다. 이 시기 태양의 신전, 달의 신전이 건설되면서 문화적, 정치적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 중심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였다.

나. 에스파냐 정복 시대

1532년 에스파냐의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는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 지역을 차지하였다. 에스파냐 왕실은 피사로를 총독으로 임명하였고, 그는 1535년 리마에 ‘왕들의 도시’라는 뜻의 시우다드데로스레예스(Ciudad de los Reyes)를 건설하였다. 리마는 태평양에 접한 리마크(Rímac) 강변에 입지하여 에스파냐와의 교류에 용이하였다. 이에 따라 1543년 리마는 새로운 페루 부왕령의 수도로 지정되었으며, 왕립 고등사법재판소가 설립되는 등 에스파냐 식민 지배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약 한 세기 동안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지역, 유럽, 동아시아 지역을 잇는 무역 네트워크의 중심지로서 번성하였다.

그러나 1687년에 발생한 지진으로 인해 리마의 경제는 침체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1746년에 발생한 또 한 번의 강력한 지진으로 인해 리마와 카야오(Callao)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당시의 총독이었던 벨라스코(José Antonio Manso de Velasco)에 의해 재건되었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 푸른길

다. 독립 이후

1821년 산 마르틴(José de San Martín)이 리마를 포위하고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리마는 독립국 페루의 수도가 되었다. 독립 이후 1850년대까지 리마는 경기 침체와 정치적 혼란으로 도시 개발이 멈추어 있었다. 그러나 1850년대부터 질산이 풍부하여 비료로 각광받은 구아노(guano)의 수출 확대를 통해 리마의 경제는 급속히 회복되었다. 1879~1884년에는 서부 연안의 영유권 문제로 벌어졌던 남아메리카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1881년부터 1884년까지 칠레에게 점령당하면서 다시 혼란을 겪었다. 전쟁 이후 1920년대까지 도시 재건이 이루어졌는데, 중앙 광장으로부터 동서남북으로 뻗은 격자망의 도시 구조가 정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용과 교육 기회를 찾아 페루 전 지역에서 이주해 오는 사람들로 인해 리마의 인구는 급속히 증가하였다. 이들은 리마의 특징적인 경관이 된 불량 주택 지구를 형성하였다. ‘젊은 마을’이라는 뜻의 푸에블로스호베네스(pueblos jóvenes)라고 불리는 불량 주택 지구는 리마의 북쪽과 남쪽 사막 지역에 광범위하게 들어서 있다.

관련이미지

페루 리마 미라플로레스

페루 리마 미라플로레스 포토갤러리

연관목차

415/1205
4. 페루
4.1.2 리마의 역사 지금 읽는 중
5. 콜롬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