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키토스의 역사

이키토스의 역사

가. 유럽 인의 유입

유럽 인이 유입되기 이전에 거주하던 원주민은 유랑형 수렵-채집인이었으며, 연중 특정 기간 동안 사용하는 소규모 취락이 위치하고 있었다. 에스파냐 인들은 파스타사(Pastaza), 티그레(Tigre), 나나이(Nanay) 등의 강 인근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을 ‘이키토스’라고 불렀다. 이후 이들은 에스파냐 인들의 압력으로 현재의 이키토스 지역, 즉 나나이 강, 아마존 강, 모로나코차(Moronococha) 호 인근 지역으로 옮겨 왔으며, 이키토스라는 도시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1730년부터 37년간 호세 바아몬데(Jose Bahamonde) 신부를 비롯한 키토 예수회는 나포(Napo) 강과 아마존 강 합류점 인근의 마라뇬(Marañón) 강을 따라 이키토스 선교촌을 설립하였다. 18세기 전반 마라뇬 강변에 거주하던 이키토스와 다른 지역의 원주민 부족들은 예수회의 일파인 키토 예수회 소속 선교사들이 설립한 선교촌(Misón)에 거주하였다.

나. 에스파냐 식민 시대

이키토스는 초기에 페루 부왕령(副王領)의 일부로 1563년에 설치되었던 키토 왕령 아우디엔시아(Real Audiencia de Quito)의 관할 아래에 있었다. 1717년에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Virreinato de Nueva Granada)으로 잠시 편입되었다가 에스파냐의 펠리페 5세(Felipe Ⅴ)가 1739년에 누에바그라나다 부왕령을 황실 직속으로 개편하면서 다시 페루 부왕령으로 귀속되었다. 1767년에 이르러서는 에스파냐 카를로스 3세(Carlos Ⅲ)의 예수회 탄압 정책으로 인해 예수회가 남아메리카 영토로부터 추방되면서 이키토스 지역에 있던 예수회 선교촌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지역 내 행정에 공백이 생겼고, 포르투갈의 무장 탐험대인 반데이란치(Bandeirantes)의 침입이 자주 발생하였다. 1802년에 에스파냐 왕실은 과거에 키토 왕립사법행정원(Real Audiencia)이 관할하던 지역을 담당하는 마이나스(Maynas) 총독부를 설치하여 포르투갈의 페루 침입을 막았다.

다. 근현대

페루는 에스파냐로부터 독립한 후에 에콰도르, 브라질과 함께 아마존 강 상류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였다. 브라질과의 국경 문제는 1851년 10월 23일 상호 자유 항해 및 우호 교류를 주 내용으로 하는 페루-브라질 조약의 체결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되었다. 1861년 1월 7일 페루의 라몬 카스티야(Ramon Castilla) 대통령은 구 마이나스를 토대로 군사적, 정치적 성격을 띤 로레토(Loreto) 주를 설치하고, 아마존 강의 전략 거점에 대한 항구 건설을 지시하였다. 이때, 이키토스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어 항구 건설이 시작되었고, 1864년 1월 5일에 페루 해군의 증기선 세 척이 이곳에 배치되었다. 도시는 점차 성장하여 1897년 11월 9일에 로레토 주의 주도가 되었고, 동시에 대목구(代牧區, 주교가 서임되어 자율 교구 제도의 운영이 가능해지기 이전 선교지에 설치되는 준교구로서, 대목구장이 교황을 대리하여 권한을 행사함)가 설치되었다.

이키토스는 아마존 강 상류 지역에 대한 페루 정부의 전략적 요충지로서, 이후 발생한 에콰도르, 콜롬비아와의 아마존 강 유역 분쟁과 군사적 충돌에서 유리한 입지를 차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마존 강 유역에 대한 페루의 전략이 에콰도르와 콜롬비아를 압도하면서, 페루는 1922년 콜롬비아와의 국경 조약과 1942년 에콰도르와의 국경 조약에서 아마존 강 상류 지역 분쟁을 유리하게 해결하였다.

1900년 초, 이키토스에 고무 붐이 일면서 고무로 부를 얻으려는 젊은 남성들이 여러 나라에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자동차 산업 등의 발달로 고무 수요량이 급격히 증가하여 이러한 추세는 가속화되었다. 일부 이주자들은 경제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유럽 출신의 미혼 남성 중 다수는 원주민 여성과 결혼하여 혼혈 가정을 이루었다. 이주자들의 대거 유입은 유럽풍 복장, 음악, 건축물 등 다양한 문화 요소들이 이키토스로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인 외에 모로코 출신의 에스파냐 계 유대 인 세파르디(Sefardí)도 이주하여 페루에서 가정을 꾸렸고, 유대 인 회당과 묘지를 건축하는 등 독특한 문화 경관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초기에 유대교 전통을 지켰으나, 4세대 이상이 되는 20세기 후반에 이르자 세파르디 사회에서 유대교적 유산의 쇠퇴가 뚜렷해졌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리마와 뉴욕의 보수파 랍비(rabbi)의 후원으로 이키토스의 유대 인 사회에서 교세가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유대교로 개종한 상당수는 이스라엘의 귀국 보장 정책에 따라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영국인의 고무나무 유출로 동남아시아 및 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을 중심으로 좀 더 값싼 고무를 생산할 수 있게 되자, 고무에 의존했던 이키토스의 경제적 번영은 점차 빛을 잃기 시작하였다. 현재 이키토스의 고무 산업은 쇠퇴했으나, 아마존 강 상류 지역에서 주요 무역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연관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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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페루
5. 콜롬비아
6. 볼리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