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의 역사

칼리의 역사

가. 식민지 시대

에스파냐 정복자들이 도착하기 전, 칼리에는 많은 토착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부족 대부분은 카리브 해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였다. 카우카(Cauca) 강과 서부 산지 사이에서 원주민 부족이 맨 처음 살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은 오늘날 롤다니요(Roldanillo)와 칼리 사이에 해당한다. 지금의 사르살(Zarzal)과 부갈라그란데(Bugalagrande) 근처에 위치한 페스카도르(Pescador) 강 연안에는 가장 큰 원주민 부족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1535년 황금의 땅 엘도라도(El Dorado)를 찾기 위해 콜롬비아에 도착한 세바스티안 데 벨랄카사르(Sebastián de Belalcázar)는 카우카 강 계곡을 따라 진입하다가 1536년에 칼리를 발견하였고, 토착 부족들과의 전투 끝에 칼리를 정복하였다. 벨랄카사르는 오늘날의 비헤스(Vijes)와 리오프리오(Riofrio) 마을 근처에서 북쪽으로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우선 정착하였다가, 1537년에 도시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몇 년 뒤인 1540년에는 칼리보다 날씨가 더 쾌적한 포파얀(Popayán)으로 식민지 주재소를 옮겼다.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엥코미엔다(encomienda)를 통해 토착 부족민들을 교화하고, 원주민 아내를 두었다. 18세기까지 칼리 일대의 대부분은 대농장인 아시엔다(hacienda)가 차지하였고, 대농장 소유주들은 수많은 노예를 거느리면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가축을 사육하였다. 18세기 말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칼리의 인구는 약 6,500명이었는데, 이 중 아프리카계 노예가 1,100여 명이었다. 당시의 대농장들은 카냐베랄레호(Cañaveralejo), 치피차페(Chipichape), 파소안초(Pasoancho), 아로요온도(Arroyohondo), 카냐스고르다스(Cañasgordas), 리모나르(Limonar), 멜렌데스(Meléndez)와 같이 오늘날 도시 내 행정 구역의 기원이 되었다.

나. 에스파냐로부터의 독립

1810년 칼리의 주민들은 에스파냐의 통치를 반대하고, 자신들의 의회를 구성하였다. 포파얀의 총독이었던 미겔 타콘 이 로시케(Miguel Tacón y Rosique)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칼리는 카우카 강 유역의 다른 도시들과 연합하여 1811년 2월 1일 포파얀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 후 에스파냐의 왕실 군대와 독립군 사이에 많은 전투가 일어났다. 1819년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가 보야카 전투(Batalla de Boyacá)에서 에스파냐 왕실 군대를 물리친 후에도 카우카 강 유역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고, 1822년에 마침내 독립을 쟁취하게 되었다.

연관목차

467/1205
5. 콜롬비아
5.3.2 칼리의 역사 지금 읽는 중
6. 볼리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