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스의 역사

라파스의 역사

라파스는 1548년에 에스파냐의 정복자 알론소 데 멘도사(Alonso de Mendoza, 1471?~1549)가 옛 잉카 제국 마을 자리에 세운 도시에서 기원한다. 그는 이 도시에 ‘평화의 성모’라는 뜻의 ‘누에스트라세뇨라데라파스(Nuestra Señora de La Paz)’라는 이름을 붙였다. 도시의 명칭인 ‘라파스’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며, 오늘날에도 정식 명칭은 이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라파스는 비록 옛 원주민의 마을터에 자리 잡기는 하였지만, 원주민의 취락이라기보다는 에스파냐 인들이 세운 도시라고 말할 수 있다. 원주민들은 경사가 급한 이 계곡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반면, 에스파냐 정복자들은 식민지 교통망에서의 전략적인 위치, 그리고 서쪽 안데스 산지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아주는 지형 등 지리적 이점에 주목하여 도시를 세웠다. 처음에는 라파스를 흐르는 초케야푸 강에서 사금이 발견되어 취락이 발달했지만, 사금은 곧 고갈되고 말았다. 하지만 인근 광산 도시였던 포토시(Potosi)에서 채굴되는 막대한 양의 은을 티티카카 호를 거쳐 페루 부왕청 소재지였던 리마(Lima)로 운반하는 길목에 위치한 덕에 라파스는 계속 성장할 수 있었고, 이후 알티플라노 고원에서 나는 산물 전체의 교역을 다루는 거점이 되었다.

한편 라파스는 엘알토의 고지대를 근거지로 하여 투팍 카타리(Túpac Katari, 1750~1781)가 일으킨 대규모 원주민 봉기로 인해 1781년 6개월 동안이나 도시가 포위되면서 원주민들의 공격으로 여러 차례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1809년 7월 16일 독립 운동가 페드로 도밍고 무리요(Pedro Domingo Murillo, 1757~1810)가 라파스에서 에스파냐에 대한 독립 투쟁을 선언하였으며, 이는 남아메리카 독립 운동의 공식적인 시작이었다. 이후 1925년까지 진행된 볼리비아 독립 전쟁에서 라파스는 수크레(Sucre)와 더불어 독립 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볼리비아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달성한 1825년에는 도시 명칭을 ‘라파스데아야쿠초(La Paz de Ayacucho)’로 바꾸기도 하였다. 1898년 사법 기능을 제외한 행정부와 입법부가 수크레에서 라파스로 이전해 왔으며, 이후 실질적인 수도로 기능하고 있다.

행정 수도가 된 이후 라파스는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으며, 2000년대에 들어와 산타크루스(Santa Cruz)에게 추월당하기 전까지는 볼리비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지금도 산타크루스와 함께 인구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볼리비아의 중심적인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중남미의 주민 구성

중남미의 주민 구성 ⓒ 푸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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