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시의 역사

포토시의 역사

포토시는 1545년에 은(銀)을 채굴하기 위해 광산촌을 건설하면서 비롯된 도시이다. 이 지역과 잇닿아 있는 포토시 산에는 많은 양의 은이 매장되어 있었다. 예로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포토시 산에 매장된 은이 잉카(Inca)의 대지 신인 파차마마(Pachamama)의 것이라는 신앙심과 종교적 경외감을 가졌기 때문에, 대규모로 은을 개발하거나 채굴하지는 않았다. 반면, 이와 무관한 식민지 개척 시대의 에스파냐 인들은 포토시의 막대한 은을 노리고 1545년 해발 고도가 4,000m가 넘는 이 척박한 지역에 도시를 건설하였다.

볼리비아의 광산과 철도망

볼리비아의 광산과 철도망 ⓒ 푸른길

포토시 산은 은광이 밀집되어 ‘부(富)의 산’이라는 뜻의 ‘세로리코(Cerro Rico)’라고 불렸다. 이곳에서 발견된 대규모의 은광은 세계 최대 규모였으며, 포토시에서 채굴된 은은 에스파냐로 흘러 들어가 막대한 부를 창출하면서 유럽 여러 나라로 유입되었다. 이는 16~17세기에 에스파냐가 세계 제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그 시기의 급격한 물가 앙등 등 유럽 경제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왔다.

포토시의 은은 쿠바(Cuba), 파나마(Panama) 등 카리브 해 일대로 옮겨져 에스파냐로 유입되었고, 일부는 멕시코의 아카풀코(Acapulco) 항구로 수송되었다가 필리핀으로 운반되어 중국 등 동아시아로 유입되었다. 동아시아로 유입된 은은 물품 구입뿐만 아니라, 중국과 유럽의 금은(金銀) 가치의 차이로 발생하는 이익을 얻을 목적으로 중국의 금과 교환하는 데 쓰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포토시에는 중국, 인도 등 아시아에서 향신료와 사치품 등이 대량으로 유입되었고, 도시가 세워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인구와 막대한 부를 자랑하는 큰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1610년에는 인구가 160,000여 명에 이르면서 남아메리카 최대의 도시로 떠올랐다. 도시가 건설된 이후 1780년대까지 200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41,000톤의 은이 포토시에서 생산되어 에스파냐로 넘어갔는데, 이는 이 시기 동안에 전 세계에서 생산된 은의 절반을 웃도는 양이었다.

남아메리카 독립 전쟁 당시 포토시는 혁명군과 에스파냐 왕당파 사이에서 수시로 주인이 바뀌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남아메리카 독립의 영웅인 마누엘 벨그라노(Manuel Belgrano) 장군의 군대가 주둔하기도 했으며, 1825년에 볼리비아가 독립하면서 볼리비아 영토로 편입되었다.

과도한 채굴로 19세기 이후 은이 고갈되면서 채산성이 크게 떨어졌고, 이는 포토시의 쇠퇴로 이어졌다. 고갈된 은을 대체하기 위해 주석이 개발되어 대표적인 산지로 꼽히고 있지만, 전성기 때의 규모와 위상에 견주어 보면 크게 쇠락한 셈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포토시는 도시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됨과 아울러 볼리비아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우유니 소금호수(Salar de Uyuni, 우유니 소금사막 혹은 우유니 염호라고도 부름)와도 인접해 있어 관광 도시로 기능하고 있다. 또한 주석과 텅스텐 등의 광업이 이루어지고 제조업도 발달하여, 볼리비아 경제와 사회에서 주요 도시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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