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루로의 역사

오루로의 역사

가. 주석의 도시

오루로는 오늘날 볼리비아 일대를 관할하던 에스파냐의 식민지 행정 기관인 차르카스 왕실 사법행정원(Real Audiencia de Charcas)의 지사였던 돈 마누엘 카스트로 데 파디야(Don Manuel Castro de Padilla)가 1606년에 건설한 광산촌에서 비롯되었다. 포토시(Potosí)와 마찬가지로 은광 개발을 목적으로 조성된 취락이었으며, 도시의 원래 이름은 당시 에스파냐 국왕이었던 펠리페 3세(Felipe Ⅲ, 재위 1598~1621)의 이름을 딴 ‘비야데산펠리페데아우스트리아(Villa de San Felipe de Austria)’였다. 현재의 이름인 ‘오루로’는 이 지역 원주민을 일컫던 ‘우루우루(Uru Uru)’에서 비롯되었으며, 볼리비아 독립 이후인 1826년에 오루로 주가 설치되면서 기존의 비야데산펠리페데아우스트리아는 주의 이름과 같은 오루로로 명칭이 바뀌었다.

오루로는 은광 덕분에 건설 직후 약 15,000명의 주민들이 몰려드는 등 큰 도시로 번영을 구가하였으나,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접어들어 은이 고갈되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이후 광산 도시 오루로가 재건될 수 있었던 계기는 또 다른 광물 자원인 주석을 개발한 데 있었다. 오루로의 주석 채굴은 은광이 주요 산업이었던 17세기부터 시작되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본격적인 개발은 19세기 말부터 이루어졌다. 볼리비아 코차밤바(Cochabamba)에서 태어난 원주민 출신의 시몬 이투리 파티뇨(Simón Iturri Patiño)가 1897년에 오루로 동쪽의 라살바도라(La Salvadora) 광산을 매입한 일이 그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대규모 주석 광산이 개발되면서 오루로는 급속히 활기를 되찾기 시작하였고, 20세기 전반에는 세계 최대의 주석 산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볼리비아의 광산과 철도망

볼리비아의 광산과 철도망 ⓒ 푸른길

나. 수탈의 역사

은과 주석이 풍부한 광산 도시였지만, 이로 인해 과거 오루로 주민들은 혜택을 받는 대신 수탈을 당해야 했던 역사도 가지고 있다. 포토시 등 다른 남아메리카 식민지 지역과 마찬가지로,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의 오루로 은광 채굴은 노예나 원주민 노동자 등의 희생과 착취를 딛고 이루어진 측면이 크다.

오루로의 어두운 이면에 있는 수탈의 역사는 볼리비아 독립 이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파티뇨(Patiño)가 거둔 광업의 성공으로 오루로는 세계적인 주석 생산지로 거듭날 수 있었지만, 20세기 초 볼리비아 주석 생산량의 50%를 좌지우지하던 파티뇨는 자신의 부와 재능을 개인의 부를 쌓는 데에만 이용하였다. 유럽에 거주하면서 영국에 주석 정련 공장을 세운 파티뇨의 행태로 인해 볼리비아는 원광석만 수출하는 나라에 머물러야 했고, 주석 개발로 얻은 부의 상당 부분은 외국 자본으로 유출되었다. 오루로 주석으로 세계적인 거부의 대열에 오른 파티뇨는 볼리비아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에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파티뇨의 손아귀에 놓여 있던 주석 광산은 1952년에 국유화되었으나, 이미 주석의 매장량과 채산성은 상당 부분 떨어진 뒤였다. 볼리비아에 처음으로 주석 정련소가 설치된 때는 이보다도 20년이나 더 지난 1972년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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