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카스의 역사

카라카스의 역사

가. 도시의 건립과 식민 시기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카라카스 계곡에 16세기 중엽 유럽 인들이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1557년에 에스파냐 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파하르도(Francisco Fajardo)가 이곳에 목장을 만들었고, 이후 후안 로드리게스 수아레스(Juan Rodríguez Suárez)가 그 자리에 소도시를 설립하였으나 곧 인근 원주민에 의해 파괴되었다. 실질적으로 도시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1567년 에스파냐의 디에고 데 로사다(Diego de Losada) 장군이었으며, 산티아고데레온데카라카스(Santiago de León de Caracas)라는 도시의 이름이 지어진 것도 이때였다. 1577년에 카라카스는 주지사 후안 데 피멘텔(Juan de Pimentel)의 지배 아래 에스파냐 제국령 베네수엘라 주의 주도가 되었다.

17세기 동안 베네수엘라 해안에는 해적들의 습격이 빈번하였으나, 카라카스는 해안의 산지가 장벽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습격의 피해를 덜 받았다. 이는 카라카스가 이 지역의 주요 도시로 성장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1680년대에 해적들은 사용되지 않던 길을 통해 산을 넘는 데 성공하여 주민들을 약탈하고 마을을 파괴하였다.

나. 독립 시기

카라카스는 에스파냐에 저항한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베네수엘라 독립 전쟁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인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Francisco de Miranda)와 시몬 볼리바르(Simón Bolívar)의 고향이기도 하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 전쟁을 계기로 베네수엘라 시민들의 독립 의지는 더욱 고취되었고, 1811년 7월 5일 카라카스에서 독립 선언이 이루어졌다. 이후 1812년 3월 발생한 지진으로 카라카스가 파괴되었는데, 이에 대해 식민 통치자는 에스파냐에 저항한 반란군에게 신이 내린 벌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시몬 볼리바르는 1813년 8월 카라카스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이듬해 1814년 6월에 크게 패하면서 다시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독립 전쟁은 1821년 6월 시몬 볼리바르가 카라보보(Carabobo)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다. 근현대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며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풍족한 석유를 바탕으로 점차 성장함에 따라, 카라카스는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특히 1950년대 이후부터 사람이 거주할 수 있는 계곡의 대부분 지역은 도시화되었다. 이 기간에 카라카스는 집중적인 현대화 프로그램을 실행하였고, 이는 1960~1970년대 초까지 계속 진행되었다.

대학을 포함한 학교 건설, 빈민가의 주거 환경 개선, 새로운 상수도관 설치, 고속 도로 입체 교차로 건설 등의 기반 시설 사업에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다. 상징적인 예로 모더니즘 건축가인 카를로스 라울 비야누에바(Carlos Raúl Villanueva)가 설계한 베네수엘라 중앙대학교(Universidad Central de Venezuela)의 메인 캠퍼스인 카라카스 대학도시(Ciudad Universitaria de Caracas)의 건축물은 2000년 유네스코(UNESCO)의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석유 생산과 수익성 증가에 따른 베네수엘라의 경제 성장은 도시의 지리적 확장과 환경 개선의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보다 나은 경제적 기회를 잡기 위해 농촌 지역에서 도시 지역으로의 이주가 급속도로 이루어지면서 이촌향도민의 주거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카라카스 계곡에 이른바 ‘란초(rancho)’라는 불량 주택 지구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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