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으로 헌신한 미륵불

화랑으로 헌신한 미륵불

분류 문학 > 이상적인물형 > 군은(君恩)형

• 갈래 : 전설
• 시대 : 삼국
• 신분 : 왕족
• 지역 : 영남
• 출처 : 삼국유사 ()
• 내용 :
신라 24대 진흥왕은 불교를 믿어 받들고 신선도 숭상하였다. 그리하여 민간의 처녀들 가운데서 아름답고 지혜로운 자를 뽑아 원화라는 지위를 주고 그 아래 무리를 모아서 효제, 충신(효성, 우애, 충성, 신의)의 도리를 가르치고자 했다. 왕은 여러 처녀들 가운데서 남모랑과 교정랑 이라는 두 처녀를 원화로 선발하고 400여명의 무리를 지휘하게 하였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교정랑은 남모랑을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어느 날 밤, 교정랑은 술상을 들고 남모랑의 방으로 찾아갔다. 자기를 질투하는 줄을 꿈에도 모르던 남모랑은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였다. “이 밤중에 웬일이야.” “남모랑, 사실은 내게 고민이 있다우. 괜찮다면 내 애기를 들어주겠어” 남모랑은 교정랑의 거짓말에 속아 술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한잔 두잔 교정랑은 고민을 털어놓는 척하면서 남모랑에게 계속 술을 권했다. 그리고는 술이 취한 남모랑에게 바깥 바람을 쐬는 게 좋겠다면 북천 시냇가로 유인했다. 그리고는 커다란 돌멩이로 남모랑의 머리를 쳐서 죽인 후 근처에 묻었다. 다음날 남모랑을 따르던 사람들이 남모랑이 보이지 않자 이곳 저곳 으로 찾아다녔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슬퍼하며 결국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런데 남모랑이 죽던 날 밤, 교정랑이 취한 남모랑을 부축해서 북천 시냇가로 데려가는 것을 본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남모랑이 교정랑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을 알고 동요를 지어서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들은 원화의 무리들이 이를 이상히 여겨 북천으로 가보니 그 곳에서 남모랑의 처참한 시체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무리들은 화가 나서 즉시 교정랑을 죽여 버렸다. 사건의 전말을 들은 진흥왕은 원화제도를 폐지하였다. 그리고 몇 년 후 국가 발전을 위해 청년들의 훈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번에는 남자들로 이루어진 화랑도를 만들었다. 좋은 가문의 자제들 중에서 덕행 있는 청년들을 뽑아 화랑이라 하고 그 무리들을 지도하는 화랑을 국선에 세웠다. 맨 처음의 국선은 설원랑으로 이 때 부터 화랑국선이 시작되었다. 그 후 진지왕에 이르러서였다. 경주 흥륜사에 진자라는 중이 있었는데 매일 아침저녁으로 법당의 미륵불상 앞에 나아가 기도를 드렸다. “미륵불이시여, 부디 화랑이 되시어 세상에 나타나주시옵소서. 제가 항상 가까이에서 시중들겠나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꿈 속에서 어떤 중이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는 지금 곧바로 웅천 수원사로 가 보아라. 거기 가면 미륵선화를 만나볼 수 있으리라.” 꿈에서 깬 진자는 기뻐하며 짐을 꾸려 가지고 웅천 수원사로 떠났다. 열흘 만에 수원사 앞에 당도하여 문 밖에서 수려하게 생긴 젊은이를 만났다. 진자는 우연히 훌륭한 젊은이를 만났구나 했을 뿐,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 젊은이와 헤어진 후에서야 그가 미륵불이었음을 알게 된 진자는 낙심을 하게 되었다. 뒤늦게 깨닫고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그 청년을 찾을 수는 없었다. 진자의 이런 사연이 왕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왕은 진자를 도와주기로 하였다. 왕이 보내준 사람들과 함께 진자는 미륵불 청년을 찾기 위해 방방곳곳을 뒤졌다. 그러던 어느 날 지쳐서 영묘사 근처를 지나는데 길가 나무에서 노닐고 있는 수려한 용모의 소년을 발견하였다. “이분이 미륵선화다!” 진자는 소년을 가마에 태워 왕에게 데리고 갔다. 왕은 그 소년을 경애하여 받들며 국선으로 삼았다. 미시화랑은 용모뿐만 아니라 행실도 반듯하여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그렇게 7년이 지난 후 그는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미시화랑이 사라진 후 진자의 슬픔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 도로 슬퍼하였다. 말년에 그 역시도 종적을 감추고 사라져버렸다. 지금 사람들이 신선을 두고 ‘미륵선화’라 하고 중매 서는 이를 ‘미시’라고 하는 것은 모두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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